밀양을 살다
밀양구술프로젝트 지음
오월의봄 발행ㆍ392쪽ㆍ1만6,000원
저들은 누구일까.
한국전력공사, 또는 국가가 규정하는 저들은 ‘정당한 법 집행을 막는 탈법 세력’이다. 기득권의 이익에 충실한 매체를 통해 비쳐지는 저들은 ‘2억원의 보상금액 차이 때문에 수조원짜리 국가사업의 발목을 잡고 있는 지역이기주의’의 표본이다. 논리보다 저주에 가까운 말들이 범람하는 온라인 공간에서 저들은 ‘종북 좌빨에 의해 조종되는 무식한 촌것들’이고, 돈을 추렴해 빌린 전세버스를 ‘희망’이라고 부르는 연대의 형식 속에서 저들은 ‘대한민국의 진실’이다. 그리고 남의 고통과 나의 행복이 명확히 구분되는 오늘을 사는 다수의 한국인에게 저들은 그저 ‘저들일 뿐’이다. 그런데, 진짜 저들은 누구일까.
2013년 12월 기록노동자, 작가, 인권활동가, 여성학자 등이 모여 밀양구술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송전탑 건설에 맞서 10년째 힘든 싸움을 벌이고 있는 밀양 주민들의 목소리와 얼굴을 듣고 기록하는 일이다. 밀양을 살다는 ‘썼다’기보다 ‘받아 적었다’고 해야 옳을 그 작업의 결과물이다. 농사 지으면서 하루하루 평범하게 살던 사람들이 어쩌자고 거대 기업과 정부에 맨몸으로 맞서고 있는지, 무엇이 아들손주 다 말리는데도 기어이 죽을 동 말 동한 긴장 속으로 지팡이 짚고 몸을 들이밀게 하는지를, 이 책에서 들여다볼 수 있다.
‘대동아전쟁 때도 전쟁 나가 행여 포탄 떨어질까 그것만 걱정했지 이러케는 안 이랬다. 빨갱이 시대도 빨갱이들 밤에 와가 양식 달라 카고 밥 해달라 카고 그기고. 근데 이거는 밤낮도 없고, 시간도 없고, 이건 마 사람을 조지는 거지. 순사들이 지랄병하는 거 보래이. 간이 바짝바짝 마른다.’(37쪽ㆍ상동면 도곡마을 김말해(87) 할머니)
고리원자력발전소의 전기를 타지로 보내기 위해 76만5,000볼트 송전탑 건설 계획을 수립한 게 2000년이다. 5년 뒤 요식적인 환경영향평가와 해당지역 인구의 0.6%가 참석한 주민설명회를 치른 뒤 송전선이 지날 경과지를 확정했다. 그때까지 76만5,000볼트가 무슨 뜻인지 아는 주민은 거의 없다. 하지만 15만4,000볼트짜리 송전탑 아래에서도 종양 발생률이 증가하고 기형아 출산, 가축 유산 등이 빈번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송전탑 아래에선 더 이상 땅이 거래되지도, 마을이 남아날 수도 없다는 것도 알게 됐다. 그래서 반대운동을 시작했다. 차근차근 말하면, 알아 들을 줄 알았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경찰과 법을 앞세운 폭력과 협박이었다. 싸움은 10년째 계속되고 있다.
‘꿈에서도 막 싸웁니더. 일이 손에 안 잡힙니더. 갔다 오면 사람 몸만 피곤하고. 동네가 얼마나 좋습니까. 공기도 좋고. 예전에는 정부에서 하는 일은 다 잘해주겠지 생각했는데, 진짜로 송전탑 문제 경험 안 했으면 몰랐지예. 데모하시는 분들 이해가 갑니다.’(278쪽ㆍ산외면 골안마을 안영수(59), 천춘정(55) 부부)
헬기로 자재를 실어 나르는 공사는 지금 군사작전처럼 진행되고 있다. 반대하는 주민들을 상대로 한 대규모 민ㆍ형사 소송도 빈틈없이 진행 중이다. 그러나 밀양의 할머니 할아버지, 연대라는 인간의 가치를 포기 못한 전국에서 온 사람들은 오늘도 송전탑이 들어설 자리에서 농성을 계속하고 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가장 큰 특징은 지극히 평범하다는 것이다.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 열일곱 살에 얼굴도 모르는 남자에게 시집을 왔다는 얘기부터 도시생활을 접고 새 삶을 찾아 귀농한 사연까지, 전국 어딜 가나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는 이야기들이다. 폭력과 투쟁의 현장에서 발견하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 그것은 오늘 저들의 투쟁이 내일은 나의 몫이 될 수도 있다는 얘기와 전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저들은 누구일까, 하는 질문은 기실 이것이다. 우리는 누구인가.
유상호기자 shy@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