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달 전에 아내를 잃었다. 만난 지 8년 만에 결혼해 28년 넘게 한 이불을 덮고 살았다. 36년 이상의 단짝을 잃은 순간의 심사를 어찌 필설로 다할까. 슬픔과 서러움, 안타까움과 원망, 후회와 자책이 뒤엉켜 가슴을 때렸다. 그날 이후 전혀 다른 세상에서 살아오며 끝없이 흔들렸다. 시간이 좀 흘러 그런 아픔이 많이 닳은 지금도 아내가 마지막 생기를 붙잡고 남긴 말을 떠올리면 눈앞이 흐려진다. “맛있는 것 많이 해주려 했는데 (먼저 가서) 미안해, (애써줘서) 고마워, 사랑해.” 앞으로도 오랫동안 귓전을 맴돌며 날 선 비수처럼 가슴을 찌를 말이다. 여느 부부처럼 싸움도 하고, 잔소리도 하며 살았으니, 먼저 떠나는 원통함이 있어도 좋았다. 최소한 꼭 살려내겠다던 철석 같은 약속을 지키지 못한 데 대한 원망이라도 쏟아낼 법했다. 차라리 그랬다면 한결 마음이 편했다.
^44개월 동안의 암 투병이 완전한 실패로 끝나기 몇 달 전부터 밀려드는 불안과 함께 의료진에 대한 원망이 커졌다. 30여 차례나 항암치료를 위한 입원과 외래검사를 반복하는 동안 환자 각각의 특성을 무시한 기계적 대응에 의존하는 의료현실이 눈에 들어왔다. 수련의와 전공의, 담당교수라는 위계질서에 충실한 의료체계, 환자보다는 컴퓨터와의 대화에 바쁜 의료진이 너무 답답했다. 석 달마다 담당 수련의와 전공의가 바뀌어 환자에 대한 연속적 추적 관찰이 불가능했다. 전임자가 넘겨준 차트의 수치를 건성으로 살피는 것만으로 환자의 구체적 상태에 접근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담당교수에게 기대를 걸 수도 없다. 대다수는 전공의의 보고에 전적으로 의존한 형식적 회진에 그쳤다. 밀려드는 외래환자와 입원환자에 일일이 대응해야 하는 처지이니 뾰족한 수가 없을 만했다. 토요일과 일요일에도 병실을 돌며 자신의 환자를 돌보는 ‘변종 교수’도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예외였다.
^의료현장의 허점에 대한 이런 문제의식은 아내를 잃고 난 뒤 금세 흩어졌다. 굳이 다투어야 할 이익이 없다는 얄팍한 계산의 결과만은 아니었다. 격앙된 감정이 가라앉자 의료진이 수많은 환자를 통해 축적한 경험자료와 그에 근거한 확률에 생각이 미쳤기 때문이다. 어차피 의료행위는 확률과 기대값에 따른다. 가령 뇌막염과 열 감기는 초기 증세가 비슷하다. 우선은 감기 처방을 하고, 그래도 증세가 호전되지 않으면 척수검사를 한다. 이 때문에 뇌막염 진단과 처방이 늦어져 치료에 애를 먹는 환자도 있다. 그런데 그런 손실의 반대편에는 무차별적 뇌막염 검사를 피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익이 있다. 그리고 그 균형점에 근접해야만 과잉진료나 부실진료 논란을 부르지 않는다. 그런 이치로 한때 원망했던 의료진에 요즘은 미안함을 느낀다.
^너무 힘들어 되도록 떠올리고 싶지도 않던 아내의 죽음을 눈시울 몇 번 적시는 정도로 담담하게 되새김질할 수 있는 것은 세월의 힘이다. 의료진에 대한 원망이 그럴 수밖에 없는 이치에 대한 이해로 바뀐 것 또한 마찬가지다. 시간이 흐를수록 기억은 풍화하고, 나쁜 기억일수록 빨리 닳는다.
^아내의 예고된 죽음에 앞서 몇 번이고 마음의 준비를 해두었지만 막상 일을 당하자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런 경험에 비추어 세월호 참사 희생자 유족의 슬픔과 고통이 얼마나 지독할지는 상상하고도 남는다. 모든 희생자의 죽음이 안타깝고 애통하지만, 자식 가진 아버지 입장에서 아직 부모 앞에서는 응석받이일 단원고 학생들과 어린아이들의 죽음은 더하다. 고통을 나누려는 국민의 정성과 세월의 힘이 이 모든 상처를 어루만져 줄 수 있기를 빈다. 아울러 애를 끊는 슬픔과 고통 때문에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사람들에게까지 원망과 비난을 퍼붓는 일 또한 사라지길 기대한다.
^절대로 기억에서 지우지 말아야 할 것도 있다. 그 동안의 수색구조 작업은 국민적 자괴감을 부르기에 충분했다. 선장과 승무원의 무책임한 태도와 수색구조 작업의 지연은 국가적 역량의 한계를 그대로 드러냈다. 이런 허점을 메우기 위한 분야별 과제는 똑똑히 기억하자. 그래야 제2의 세월호 참사를 막을 수 있다.
/황영식 논설실장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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