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 작가들 가운데도 ‘임’을 ‘임’이라고 써야할지 ‘님’이라고 써야할지 망설이는 사람들이 없지 않다. 현대 한국어에서 ‘님’은 의존명사이거나 접미사일 뿐이어서 사모하는 어떤 대상을 말할 때는 ‘임’이라고 써야 한다는 여러 한국어사전의 명령이 추상 같으니 결국 ‘임’으로 쓰기는 하지만, 마음에 차지 않아 입술을 깨무는 사람들이 또한 많다. 한용운 선사의 시집 ‘님의 침묵’의 영향이 클 것이고, ‘임’으로는 그 말이 담아야 할 추상적인, 추상적이기에 거룩한 의미를 다 표현할 수 없을 것 같은 느낌도 작용할 것이다. 이 느낌이야 근거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지만, ‘님’은 ‘임’과 달리 ‘ㅁ’ 발음으로 입을 결정적으로 닫기 전에 혀끝이 입을 한 번 막았다 트게 되니 거기서 오는 생동감이 말에 활기를 주는 것은 사실이다. 거룩하고 추상적인 것일수록 육체적 생동감을 요구하게 마련이다.
한국의 대표적인 운동가요인 ‘임을 위한 행진곡’이 1981년 5월에 탄생했을 때도 그 첫 악보에 달린 제목은 ‘님을 위한 행진曲’이었다. 백기완의 시 '묏비나리'의 한 대목을 다듬어 가사를 만들고 김종률이 곡을 붙인 노래는 널리 알려진 것처럼 5ㆍ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 대변인으로 활동하다 마지막 날 전남도청에서 계엄군에게 사살된 윤상원과 ‘들불야학’을 운영하다가 1979년 겨울에 숨진 노동운동가 박기순의 영혼결혼식에 헌정된 노래극 ‘넋풀이’를 통해 처음 발표되었다. 그때가 1982년이다. 가사를 다듬은 소설가 황석영이 광주에 머물 때, 그의 자택에서 이동식 카세트테이프로 조악하게 녹음되었던 이 노래극은 저 80년대의 겨울왕국에서 말 그대로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않으려는 사람들 사이에 구전으로, 악보로, 카세트테이프로 전파되어 1980년대 중반에는 시위현장에서마다 듣게 되는 대표적 민중가요가 되었다.
백기완이 “유신잔재 청산을 위해 투쟁하다가 붙잡혀 1980년 서울 서빙고 보안사에서 고문의 고통을 이기고자” 썼다고 스스로 밝힌 시 ‘묏비나리’는 전문이 150행에 달하니 짧은 시가 아니다. ‘비나리’는 남사당패 등이 그 마당놀이의 마지막 과정인 성줏굿에서 걷어 들인 곡식이나 돈을 상 위에 올려놓고 외우는 고사소리를 뜻하고 ‘묏’은 산을 말할 것이니, ‘묏비나리’는 산신제의 고삿소리 정도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아직 못 이룬 바람으로 조국의 산천을 흔들려는 이 시는 슬프면서 힘차고, 슬프기에 힘차다. ‘임을 위한 행진곡’의 가사는 이 긴 시에서 가장 서정적인, 다시 말해서 가장 비장한 대목을 끌어왔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 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첫 구절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는 ‘사랑도 남기지 않고 명예와 이름도 남기지 않고’라는 뜻일 텐데, 조금 의외로운 데가 있다. 조국을 민주화하려는 거친 투쟁에 들어선 자가 무명의 전사로 한 생애를 바치겠다는 결심은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사랑”은 다르지 않는가. 그러나 이 구절은 백기완의 ‘묏비나리’에서 그대로 가져온 것이라는 점을 상기하면 쉽게 이해가 된다. 그에게서 “뜨거운 맹세”는 동지들 간의 맹세가 아니라 그 개인의 다짐이었다. 그는 대의의 실천을 위해 가족 간의 정의(情誼)를 비롯해서 사소한 인간적 연민을 희생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동지들 간의 결의가 문제되는 행진곡에서는 백기완의 저 다짐 위에 인간이 세상과 자연에 바쳐야 할 사랑을 ‘남김없이’ 바치겠다는 다짐을 덧붙인다.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에서 “깃발만”의 ‘만’에는 감출 수 없는 실망의 표현이 들어 있다. 여기에 해당하는 백기완의 시구에서도 이 점은 마찬가지다. “싸움은 용감했어도 깃발은 찢어져.” 시인은 평생에 걸쳐 나아가야 할 싸움에서 헤쳐나가기 어려운 궁지에 처해 있다. 아마도 시인은 서빙고 보안사에서 이 시를 쓰며 모진 고문 끝에 자신의 목숨이 다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세월은 흘러가도 / 굽이치는 강물은 안다”는 이어지는 두 시구가 그것을 말해준다. 그는 아직 이루지 못한 바람과 뜻을 역사와 조국의 산천에 부친다. 그는 누구에게 연락도 할 수 없는 처지에서 골방에 갇혀 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을 만든 사람들도 숨어서 작업을 했지만, 그들의 조건은 그보다 나았다. 아니 역사가 좀 더 힘을 얻었다. 그들의 곁에는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밖에는 벌써 호응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새 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고 말할 수 있었다. 그들이 이어서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고 노래할 때, 그들의 역사와 산하는 백기완의 그것보다 훨씬 더 가까이 있었다. 세상은 여전히 험해도 그 짧은 기간에 저 닿을 수 없는 미래가 그만큼 더 가까워졌다고 말해야 한다. 백기완은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골방에서 “일어나라 일어나라” 혼자 절규했지만, 1982년의 광주에서는 벌써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을 상상할 수 있었다.
이 노래는 그 연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죽은 자들의 넋을 달래는 진혼가의 성격이 강하다. 격렬한 투지와 비상하는 정렬을 앞세우는 다른 운동가요와 달리 장엄하지만 슬프게 가사의 음절 하나하나를 음미하듯이 천천히 불러야 하는 것도 그 밑바닥에 죽음이 있기 때문이다. 죽음은 눈앞의 투명한 시간을 저 먼 지평선의 불투명한 시간에, 다시 말해서 한 생명의 모든 바람이 무한의 형식으로 펼쳐져 있는 미래에 연결시키기에 힘을 뽐내지 않고 뒤에 쌓는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한 시대의 슬픔과 한 시대의 희망과 한 시대의 위업을 위해 만들어졌지만, 이 희망의 무한 원칙에 의해 시대를 넘어서서 혹은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서, 독립군들이 만주벌판에서 불렀어도 좋았을 노래가 되고,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대원들이 형장에서 부르기를 마다하지 않았을 노래가 되었다. 불교적으로 말하면 거룩한 자비심에서 우러난 비원이 거기 있고, 기독교적으로 말하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문득 자기를 돌아볼 때의 은혜가 거기 있으며, 문학적으로 말한다면 고양된 열정으로 성화된 정신의 시적 상태가 거기 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한국의 마음이 어느 때보다도 더 순결한 희망으로 가득 차 있을 때 만들어진 노래이지만, 이 노래가 한국에서만 불리는 것은 아니다. 대만, 홍콩, 필리핀 그리고 일본에서도 사회운동가들이 제 나라 말로 이 노래를 부르고 있으며, 미국에도 이 노래가 알려져 있다. 한국의 한 시인이 국제시인대회에 초청을 받아 미국에 갔던 길에 하버드대학 교정에서 귀에 익은 노래를 들었다. 처우개선을 요구하는 도서관 직원들과 그에 동조하는 학생들이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고 있었다. 그 참가자 가운데 한 사람이 한국에 유학 와서 여러 해를 산 사람이었다.
한국에서도, ‘임을 위한 행진곡’은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 현장에서 가장 많이 불린 노래이고 광주의 5·18 민주화운동과 깊이 연결된 노래이지만, 진보운동권에서만 이 노래를 부른 것은 아니다.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 노무현 후보가 당선되었을 때 이회창 후보 지지자들의 일부가 개표에 부정이 있다고 주장하며 시위를 한 적이 있다. 나는 그 무렵 대구에서 강연을 하고 올라오던 길에 고속버스터미널에서 그 시위자들을 만났다. 그들이 종주먹을 움켜주고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고 있었다. 나름대로 자신들이 의로운 일을 하고 있다고 믿었을 그들은 이 노래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을 위한 노래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 노래는 운동가요를 넘어서서 민중가요가 되었다. 역사의 풍요로움은 그 역사가 만든 이야기와 노래로 측정된다. 이야기는 그 정신의 여정이 어디서 출발하여 어디를 돌아 어디까지 갔는가를 말한다. 노래는 그 여정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며 얼마나 슬펐으며 얼마나 자주 희망을 되새겼으며 얼마나 고결했던가를 말한다. 우리는 현대사에서 지극히 고통스럽고 지극히 고결했던 순간에 ‘임을 위한 행진곡’을 만들고 불렀다. 이 노래는 모든 오욕과 영광을 넘어서서 우리가 슬픈 날에도 우리가 기쁜 날에도 우리 곁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고려대 명예교수ㆍ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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