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사(高士)가 물가에 자라 난 나무 아래에서 상념에 빠져 유유히 먼 산을 바라보는데 화면 뒤쪽의 먼 산은 짙은 안개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저녁 무렵 산사에 밥 짓는 연기가 피어나고 멀리 제비가 날아다니는 사방에 희뿌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다. 우리가 흔히 동양화라고 부르는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문화권의 옛 그림에서 종종 마주치는 장면이다. 동양화에서는 이처럼 구름이나 안개와 같이 아무런 붓질이나 색채도 없는 흔히 여백이라 불리는 빈 공간이 있다. 불투명한 유화물감으로 몇 번이고 덧칠하여 화면 가득 빈틈없이 채색하는 서양화와는 달리 동양화의 여백은 어떠한 형체나 색도 표현하지 않은 동양화 특유의 공간이다. 국어사전을 보면 여백은 ‘종이 따위에,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고 남은 빈 자리’라 되어 있어 마치 텅 비어 있는 공간으로 인식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여백은 그냥 비어 있는 공간이 아니다. 여백은 그림을 보는 이가 자신의 선과 색으로 비어있는 부분을 채워보라는 의미를 가진 능동적 공간이다. 동양화는 완성된 작품을 제시하는 서양화와 달리 보는 이와 교감하고 대화한다는 점에서 이루어가는 그림이다. 완성된 그림이 아니라 완성을 지향하는 그림이라는 의미이고 교감을 통해 완성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동양화는 현재진행형의 그림이다. 동양의 옛 그림에 찍힌 숱한 도장과 그림에 이어 쓴 글들은 그림과 작가에 공감하는 숱한 인물들의 느낌과 감상의 반영으로 작품의 의미와 격을 높이는 데에 기여한다. 동양의 그림은 그 시대는 물론 후대의 사람들에 의해 점차 그 의미가 더해지는 그림인 것이다. 동양화는 보는 이와 교감하는 그림이기 때문에 가득 채우면 보는 이가 끼어들 틈이 없게 된다. 그래서 줄이고 또 줄이게 된다. 덜어내고 덜어냈기에 오히려 더 큰 의미를 남기는 것이 동양의 방식이다. 목청껏 소리를 내기보단 절제를 하기에 더욱 호소력이 강한 명창의 소리와 비슷하다고나 할까.
완성을 지향하는 동양의 여백과 비슷한 개념의 조형예술로 서양의 토르소(torso)가 있다. 토르소는 ‘목ㆍ팔ㆍ다리 등이 없는 동체(胴體)만의 조각 작품’이다. 몸뚱이만 있는 토르소에 팔과 다리의 형상을 상상하여 붙이고 저 몸에 어떤 얼굴이 어울릴까를 상상하는 것이 토르소 감상의 요체이다. 이런 눈으로 바라 보다 보면 기괴한 조각이 멋지고 완벽한 육체가 되어 움직이는 모습으로 변한다. 조각은 그 시작에서부터 움직임을 지향해 왔는데, 절제를 거듭한 토르소야말로 역설적으로 조각의 지향점을 가장 잘 반영해낸 것이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세월호 침몰로 온 국민이 애도하는 이 시국에 여백과 토르소라는 한가한 얘기를 장황하게 늘어놓는 이유는 이번 사건을 겪으며 동양 옛 그림의 여백이 한편으로는 초라하고 야비한 현실을 가려주는 역할을 하는 가리게 같은 것이 아닐까 싶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옛날 동양의 화가들 역시 지금의 우리처럼 보고 싶지 않은 것이 많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 시절이라고 인간사가 평온하고 아름답지만은 않았으리라. 문명의 수준이란 결국 인간의 욕심을 얼마나 세련되게 가리는가에 따라 고하가 정해지는 것이 아닐까 싶다.
승객을 팽개치고 먼저 달아난 선장과 선원, 안전은 안중에 없는 탐욕스런 선주, 일주일이 지나도록 실종자 수조차 헤아리지 못하는 당국, 칸막이 하나 없이 일상이 공개된 유가족, 사망자들이 받을 보험료를 먼저 소개하는 뉴스, 희생자를 조롱하는 일베, 사망자 시신 명단 앞에서 기념사진 찍으려던 공무원, 응급 약품 밀쳐낸 귀빈석에서 컵라면 먹다 사진 찍힌 장관, 그 컵라면에 계란이라도 넣었느냐고 반문하는 대변인, 오히려 좋은 공부의 기회라고 떠벌리는 정치 철새 등등 우리는 직시하고 싶지 않은 군상을 똑똑히 보았다. 지금까지는 억지로 치부가 가려졌지만, 이제 그 추악하고 미개한 민낯이 낱낱이 드러났다. 우리가 사는 사회가 삼류도 못 되는 곳이었음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여백과 같은 가림막이 사라져 버린 2014년 4월 이후는 결코 그 이전과 같아질 수 없을 것 같다.
김상엽 건국대 인문학연구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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