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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로 끝나선 안돼… 기자도 나중에 허망하게 자식 보내지 않으려면"

입력
2014.04.22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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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침몰 참사로 실종된 김민영양의 가족들은 팽목항에서 온몸이 떨리는 분노와 억장이 무너지는 슬픔, 그리고 절절한 그리움이 교차하는 시간과 싸우고 있다. 22일 민영이의 생환을 기다리며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는 가족들의 뒷모습이 애달프다. /진도=왕태석기자 kingwang@hk.co.kr/2014-04-21(한국일보)
세월호 침몰 참사로 실종된 김민영양의 가족들은 팽목항에서 온몸이 떨리는 분노와 억장이 무너지는 슬픔, 그리고 절절한 그리움이 교차하는 시간과 싸우고 있다. 22일 민영이의 생환을 기다리며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는 가족들의 뒷모습이 애달프다. /진도=왕태석기자 kingwang@hk.co.kr/2014-04-21(한국일보)

“바다, 파도소리 참 좋아했는데 이젠 보기도 듣기도 싫어.”

일찌감치 자리에 누웠던 현숙(52)씨는 길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스티로폼 위에 담요와 이불을 층층이 쌓아 새어 드는 바닷바람은 막았지만, 아이들을 순식간에 집어 삼킨 저 공포스런 바다의 뒤척임은 기어이 텐트 안을 파고 들어 머리를 어지럽혔다.

현숙씨는 약 먹고 이마에 물수건까지 얹었지만 연일 머리를 쥐어짜는 두통이 쉬 가시지 않는 듯했다. 여섯 가족이 함께 쓰는 텐트 안은 한밤에도 불이 환하게 켜져 있다. 언제 전해질 지 모를 기적 같은 기별을 고대하며 어미, 아비들은 엿새째 밤을 전전반측했다.

“민영아, 아침 먹을 시간이야”

22일 새벽 4시 전남 진도군 임회면 팽목항. 대형 텐트들이 수십 동 늘어선 부둣가 한 켠에서 새끼를 찾는 어미의 길고 긴 통곡이 들려왔다. “아가, 엄마 냄새 나잖아. 어서 따라 나와. 제발 살아 돌아와….” 얕은 잠에 빠진 듯했던 현숙씨가 조용히 일어나 텐트 밖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아무도 그의 발길을 붙들지 않았다.

생존자 숫자는 ‘174’로 고정된 채 사망자 숫자는 연일 더하기를, 실종자 숫자는 빠르게 빼기를 해 가는 ‘사망자 현황판’ 앞. 아버지들이 연신 담배를 태우며 ‘신원미상’ 사망자의 인상 착의를 찬찬히 들여다 보고 있었다. 어떤 가족들은 난롯가에 모여 앉아 끝도 없이 이어지는 뉴스 특보에 시선을 고정했다. 현숙씨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다시 돌아 온 텐트 안.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 있던 실종자 가족들이 하나 둘 일어나 앉아 긴 한숨을 쉬었다. “(시신) 찾으면 다행이야. 아주 못 찾으면 더 큰일이야.” “정치인들은 다 똑같은 놈들이야.” “내 새끼, 어서 만났으면 좋으련만….”

수학여행 떠났던 둘째 딸 민영(17)이가 침몰한 배 안에 갇힌 지 이레째. 중 키에 마른 체격인 아버지 성규(56)씨는 나날이 허깨비마냥 말라가고 있다. 오전 6시가 다가오자 그는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렸다. “우리 민영이 아침밥 먹일 시간인데…. 내가 10년 가까이 우리 민영이, 아영이(큰딸) 아침 챙겨주려고 매일 6시에 일어났어요. 지금도 그 시간에 알람 맞춰져 있어.” 아침 밥 먹일 아이는 아직 소식이 없는데, 그렇게 또 하루가 밝아왔다.

“죽은 아이 내 딸 아니야, 귀가 달라…”

성규씨 부부를 처음 만난 곳은 세월호가 침몰한 지 이틀째인 지난 17일 오전 목포의 한 병원 장례식장에서였다. 그는 사망자 명단에 단원고 2학년생 ‘김민영’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팽목항에서 택시를 타고 왔다고 했다. 먼저 와 있던 민영이 1학년 때 담임 선생님은 “민영이가 아닌 것 같다”고 조심스레 전했다.

“그래도 ‘혹시’라는 게 있잖아요. 내 자식이면 어떻게 해.” 시신을 확인한 성규씨는 고개를 저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에요, 우리 민영이. 오른쪽 엄지 손가락이 달라요. 귀 모양도 아니야.” 17년 금쪽같이 키운 딸의 얼굴을, 여행 길에 입혀 보낸 옷가지를 왜 알아보지 못할까마는, 아버지는 차갑게 식은 어린 주검이 절대 내 딸일 수 없는 이유를 짚고 또 짚었다. “우리 민영이 살아있다는 희망을 좀 더 가져도 되겠죠?” 성규씨는 여전히 몸을 떨면서도 실낱 같은 희망의 끈을 붙든 채 팽목항으로 돌아갔다.

그 후 닷새가 지난 21일. 해경과 해군 구조ㆍ수색팀이 세월호 선체에서 발견한 어린 주검들이 하나 둘 들 것에 실려 오는 팽목항에서 민영이네 가족을 다시 만났다.

“정부가 다 구해줄 거라 믿었는데…”

성규씨 부부는 경기 안산시에서 22년째 입시 보습학원을 운영하고 있다. 말수가 적은 성규씨는 아이들에게 무서운 수학 선생님, 현숙씨는 아이들 고민도 곧잘 들어주는 영어 선생님이었다. 민영이 말고도 이들 부부가 가르치던 단원고 여학생 3명이 바다 속 배 안에 아직 갇혀 있다. 함께 떡볶이 먹으며 재잘거리던 아이들, 시험 못 쳐 엄하게 꾸짖어도 돌아서면 저희들끼리 뭐가 그리 좋은지 깔깔거리며 웃던 아이들이다. 시커먼 바다 밑에 뒤집힌 채 가라앉은 배 안에서 공포에 질린 어린 것들이 얼마나 애타게 어미, 아비를 불렀을까.

현숙씨는 사고 첫날 진도 실내체육관으로 달려 왔을 때만 해도 ‘정부가 알아서 구해주겠지’ 생각했다고 했다. 건성 피부인 민영이가 바를 알로에와 갈아입을 옷가지, 많이 놀랐을 아이에게 먹일 청심환이 현숙씨가 챙긴 전부였다. 하지만 체육관에 붙은 구조자 명단 76명에 민영이 이름은 없었다. 순간 필름이 툭 끊기며 세상은 온통 흙빛으로 바뀌었다.

“사고 당일, 날씨가 참 좋았어요. 방송에서 하늘이 도와줬다고 말할 정도였죠. 그런데 인간이 안 도와줬어요. 해경은 배에서 뛰쳐나온 애들 건진 것 말고는 한 것이 없어요. 우리 가족들이 난리를 쳐야 해경이 나가서 뱃머리 아래만 비죽 나온 배 주변을 몇 번 수색하는 게 다였어요. 그러던 중 ‘머구리’ 배가 와서 잠수부가 수색할 수 있게 됐는데, 해경이 하지 말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들려왔어요. 믿음이 조금씩 사라져 간 거죠.”

학부모들이 더디기만 한 구조 작업에 분노하는 사이, 정치인들은 줄지어 얼굴 도장을 찍고 갔다. 현숙씨는 “정몽준도, 안철수도, 와서 인사만 하고 가는 게 다였다.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남경필 멱살 잡은 것도 나”라며 울분을 토했다.

“우리가 자식 잃고 실성한 부모인가?”

실종자 가족들은 정부 대책본부가 이른바 ‘에어포켓’에서 견딜 수 있는 ‘골든 타임 72시간’을 무력하게 보내 버렸다는 것에 분노했다. 현숙씨는 “정부는 날씨 탓을 하거나 보고 체계와 절차상 문제를 언급하며 구조 작업에 소극적이었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실종자 가족들이 스스로 방법을 찾는 동안 민간 잠수부들이 구조를 돕겠다고 몰려 왔다. “해경 쪽에서 예산 결재가 떨어지지 않아 민간 잠수부 투입이 어렵다고 했어요. 가족들이 비용을 댈 테니 머구리배를 투입하도록 허락해 달라 했어요. 그런데도 결국 안됐죠. 이틀이나 지난 18일에야 머구리배가 투입됐는데 방송에서는 정부 주도로 (구조 작업이) 이뤄지고 자원봉사자는 조금 도왔다는 식으로 나오더군요. 화가 났어요.”

현숙씨는 그 뒤 비슷한 일이 계속 반복됐다고 했다. 현숙씨 곁에 있던 다른 학부모가 “실종자 가족들의 다급한 요청에 구조 작업 책임자라는 지방경찰청장은 ‘내가 할 수 있는 한계가 여기까지’라는 식으로 말했다. 그러니 최고 책임자인 대통령을 만나야 했다”고 거들었다. 분노한 실종자 가족 150여명은 지난 20일 청와대로 가겠다며 한밤중에 11㎞를 행진하다 진도대교 앞에서 경찰과 대치하다 총리 면담을 약속 받고 발길을 돌렸다. “언론은 왜 우리가 청와대로 가는지 제대로 보도하지 않았어요. 전부 자식 잃고 실성해 난리 치는 부모라는 식이었죠.”

“민영아, 언니가 많이 보고 싶어”

큰딸 아영(22)씨는 유학 중인 미국에서 사고 소식을 들었다. 포털에 뜬 사망자 명단에서 민영이 이름을 보고 바로 비행기에 올랐다. “민영이가 죽지 않았다는 걸 알고는 한국에 도착할 때쯤엔 이미 구조돼서 만날 수 있을 줄 알았어요. 뭐 하고 놀지, 생각하면서 왔는데 막상 도착해 보니 비행기 타기 전과 달라진 게 아무것도 없었어요.”

아영씨는 몸과 마음이 다 피폐해진 부모를 돌보느라 슬픔을 내보일 겨를이 없다. 청와대로 항의하러 가던 길에 “민영이가 이렇게 컴컴한 데 있는데 겁 많은 애기가 어떻게 혼자 오지?”라며 혼잣말을 하던 아버지의 눈빛이 심하게 흔들렸다. “아버지는 텐트로 급히 옮겨진 뒤에도 사망자 현황판을 한 번만 더 살펴보자며 ‘1, 1’을 계속 외쳤어요. 외신기자를 붙잡고 ‘진실이 (따로) 있다. 정부가 말하는 건 다 거짓말’이라고 소리치기도 했죠.”

아영씨가 동생을 마지막으로 본 것은 지난해 6월. 미치게 보고 싶지만 부모님 앞에선 마음 놓고 울 수도 없다. “팽목항에 있는 모든 실종자 가족 중 제가 가장 오래 못 봤을 거예요. 바쁘다고 화상채팅도 많이 못했는데….” 아영씨는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이만하면 ‘좋은 부모’인 줄 알았는데….”

현숙씨는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송두리째 부정 당한 느낌이라고 했다. “대학 나와 22년간 학원 운영하면서 앞만 보고 열심히 살았어요. 남부럽지 않게 큰 아파트에 살고 자동차도 있고, 애들 어학연수 보내고 큰 딸은 미국에서 대학 다녀요. 나는 지금까지 내가 좋은 부모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알고 봤더니 자식 먼저 보내는 못난 부모였던 거야.”

현숙씨는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당시 신문에서 봤던 사연을 떠올렸다. “아버지가 시각장애인 딸 데리고 백화점에 옷 사러 갔다가 깔려 죽게 됐는데, 아버지 말이 ‘마지막 가는 길 같이 가서 다행이다’였어요. 그 기사 보고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 그런데 20년 지나서 내가 똑같은 상황이야. 나도 같이 갔으면 한이라도 없지….”

그는 “그때 눈물 흘리는 걸로만 끝내지 않고 안전, 구조 시스템 체계적으로 갖추라고, 잘 지키라고 들고 일어났다면 지금 내가 여기 있을까”라고 되물었다. “박 기자도 결혼해서 애 낳을 거잖아요. 지금 젊은 세대들이 들고 일어나야 돼. 그렇지 않으면 20년 뒤 당신이 나처럼 이렇게 허망하게 자식을 보낼 수 있어요. 이 이야기를 제일 하고 싶어. 이 이야기 기사에 꼭 써줘야 해요. 제발, 가만히, 있지, 말아 달라고.”

진도=박소영기자 sosyou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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