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집 살고 윗집 사는 손자손녀 같은 아이들이 죽고 실종됐잖아.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어, 제 명에 못 살 거 같아. 그 어린 것들 보내고 남은 사람들은 어떻게 살라고….”
진도 여객선 침몰 사고로 교사와 학생 250여명이 숨지거나 실종된 경기 안산시 단원고 부근 한 노인정. 20일 오후 이곳에서 뉴스 특보를 보고 있던 배모(78)씨는 “화가 나 더 못 보겠다”며 TV 전원을 껐다. 30년 넘게 고잔동에 산 그에게 이번 사고를 당한 아이들은 매일같이 얼굴 마주치던 친구의 손자이거나 단골 슈퍼집 딸이어서 친 손주나 다름없다.
할아버지는 어처구니 없는 사고로 생때같은 아이들을 보낸 분을 삭이지 못했다. “모든 일을 대충대충 처리하다 생긴 사고잖아. 나라 전체가 총체적인 문제예요. 나라가 이렇게까지 망가졌는지 몰랐다고….” 한참 울분을 토로하던 할아버지는 혹시나 생존자 구조 소식이 있을까 싶어 다시 TV를 켜고 뉴스 화면으로 눈길을 돌렸다.
단원고가 위치한 안산시 고잔동은 수학여행을 떠났던 이 학교 2학년 학생들 가운데 30%가 넘는 109명이 살고 있다. 세월호 침몰 사고 이후 고잔동은 동네 전체가 초상집 분위기다. 희생된 아이들은 내 집 딸 아들, 손자 손녀뿐 아니라 친척이나 친구, 가까운 이웃의 아이들이거나 내 아이의 친구들이어서 ‘두 집 건너 한 집’이 사고 피해자나 마찬가지다.
이날 단원고 주변 빌라촌의 거리와 공원 등에선 주말인데도 인적을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평소 주말 같으면 학생들과 젊은 연인들로 북적거렸을 고잔동의 M영화관도 예매율이 평상시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20년째 고잔동에 살고 있다는 이형복(48)씨는 “동네 전체가 우울증에 걸린 것 같다”며 “뭐라도 해야겠다 싶어서 숨진 학생, 교사들의 빈소가 차려진 안산제일장례식장에서 봉사 활동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며칠 만에 집밖에 나왔다는 김지수(44ㆍ여)씨는 “동네가 사람 사는 동네 같지가 않다”며 “실종자 가족들을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마주치기가 두렵다”고 안타까워했다.
사고 여파로 안산시 전체가 깊은 절망에 빠져들자 경기도와 안산시는 시민의 정신적 충격 해소를 위해 ‘통합재난심리지원단’ 운영에 들어갔다.
심리지원단은 고려대 안산병원과 단원고, 장례식장 곳곳에 통합재난심리상담소를 설치하고 전문 상담사들을 배치해 사고와 관련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불안 등 정신적 고통을 겪고 있는 유가족, 학생 등을 위한 상담활동을 한다. 재난 피해 학생과 유가족, 교사는 물론 안산시민 전체를 대상으로 심리적 안정과 일상생활 복귀를 돕는 우울ㆍ심리상담ㆍ심리치료ㆍ교육 등도 진행할 예정이다. 또 대상자별 설문조사와 기초상담을 통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정도를 파악한 뒤 집단 심리상담을 펼치고 고위험군에 대해서는 전문 상담을 실시하는 등 다양한 심리 안정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경기도광역정신건강증진센터 김현수 센터장은 “사고의 직접적인 피해를 당한 가족들 뿐만 아니라 시민 전체가 심리적으로 큰 상처를 입어 심리적인 상담과 상황에 따라 치료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면서 “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한 재난 사고는 수 년이 지나도 그 후유증이 남아있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실제 2001년 미국에서 발생한 9ㆍ11 테러 이후 뉴욕 맨해튼 주민 7.5%가 PTSD를 겪었고 9.7%는 우울증 증세를 보인 것으로 조사됐다. 테러로 붕괴된 세계무역센터(WTC) 인접 주민들의 경우 그 정도가 더욱 심각해 5명 중 1명 꼴로 PTSD에 시달렸다. 피해 여파는 10년이 지나도 계속돼 2011년 뉴욕 주민들을 상대로 한 설문 조사에서 테러 이전으로의 일상 복귀는 불가능하다고 답한 응답자가 36%에 이르렀다.
안현의 이화여대 심리학과 교수는 “안산 지역 전체가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고 봐야 한다”면서 “앞으로도 심리 상담에서 치료까지 지역사회에 대한 지속적인 지원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안산=김기중기자 k2j@hk.co.kr
손효숙기자 sh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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