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서 먼저, 교과서 나중’이 상식이던 시절이 있었다. 말이 나중이지, 대입 본고사 핵심과목 교과서를 고교 졸업 때까지 깨끗하게 간직한 친구도 적지 않았다. 교과서만이 아니었다. 대학 졸업 전에 꼭 읽었어야 할 인문ㆍ사회과학 기본 교양서도 비슷한 처지였다.
뒤늦은 고백이지만, 해설서나 비평서만 읽고서도 마치 다 읽은 것처럼 착각했던 대표적 기본서가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론이다. 그릇된 기억의 침윤에서 벗어나 제대로 된 5권짜리 번역본을 산 지 오래지만 아직까지 완독하지 못했다. 한동안 좋은 핑계였던 독재정권의 지식 탄압이 진정한 이유는 아니었던 셈이다. 스스로의 게으름 탓이다.
그런 게으름 덕분에 건진 책도 있다. 1970년대 말인지 80년대 초인지 소외론 연구가 나왔다. 정문길 고려대 명예교수의 박사학위 논문을 손질한 단행본이다. 당시 뜨거운 쟁점이던 ‘소외’를 철학적, 정치경제학적으로 규명하려는 국내 최초의 본격적 시도였다. 청년 마르크스의 경제ㆍ철학 수고(手稿)를 집중적으로 소개한 이 책 덕분에 마르크스가 헤겔과 포이에르바흐로부터 이어받은 ‘외화(外化, Außerung)’나 ‘유적(類的) 존재(Gattungswesen, Species-being)’ 등의 개념에 눈떴다. 그것이 수고를 건너뛰어 정신현상학과 기독교의 본질을 찾아 읽게 된 계기였다.
정신현상학은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빼면 제대로 기억에 남지 않았다. 이와 달리 기독교의 본질은 비교적 또렷한 기억으로 남았다. 논리 전개가 그만큼 간명해서다.
책 앞머리부터 곧장 본론으로 들어간다. ‘인간과 동물을 가르는 것이 의식이라고 할 때의 의식은 엄밀한 의미의 의식이다. 자기 감정의 인식이나 외적 사물에 대한 판단 등의 일반적 의식은 동물도 가능하지만, 엄밀한 의식은 스스로의 유(類)나 본질을 사고 대상으로 삼는 존재에게나 가능하다. 또 이런 존재만이 다른 사물 또는 존재의 본질적 성격을 사고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 스스로를 의식의 대상으로 삼는 헤겔의 ‘자기의식’에, 본질적으로 의식의 대상이자 스스로가 그 일부여서 저절로 주관과 객관을 통합하는 ‘유적 존재’에 대한 의식을 덧붙였다. 하이데거가 말한 ‘현존재의 세계 내 존재로서의 특성’과도 닮았다.
이를 근거로 바로 종교 분석에 들어간다. ‘인간이 의식하는 (유적존재로서의) 자기 본질은 이성과 사랑, 의지 등에서 보듯 무한하고 절대적이며, 그 자체가 목적이어서 완전하다. 바로 신(神)의 본질이다. 종교는 인간이 스스로의 본질을 떼어내 추상화하고, 자신에게는 비본질적이고 불완전한 것만 남긴 결과다. 종교는 인간의 자기분열의 결과이고, 신은 소외(외화)된 인간이다. 그런 소외가 종교적 억압과 인간의 종교적 고통의 본질이다.’
저자는 이런 가설을 잣대로 삼위일체와 성모, 창조, 신의 형상, 기도, 기적, 부활 등을 하나하나 분석한다. 독실한 가톨릭ㆍ기독교 신자는 물론이고,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은 적잖은 불쾌감을 느낄 만하다. 반면 종교의 역할과 기능은 인정하면서도 종교적 신념에 빠져들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선택을 정당화할 든든한 논리를 챙길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스스로 이해하기로는 그런 편협한 인상으로 집어 던지거나 간직할 책은 아니다.
왜냐하면 종교를 보는 시각이 부분적으로 달라진다고 해서 모든 종교가 중요한 가치로 삼아온 것들을 버릴 수는 없다. 공동체와 개인의 행복에 도움이 되는 가치라면, 그것이 원래 인간의 것이든 신의 것이든 무슨 상관인가. 중요한 것은 되찾아 갖거나 신의 뜻에 복종함으로써 얻는 방편의 차이가 아니라 그에 부합되게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종교가 되레 개인과 공동체를 억압하는 일탈을 대할 때마다 이 책이 다시 읽고 싶은 것도 그 때문이다. 황영식 논설실장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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