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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17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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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1월 18일, 시에라리온(Sierra Leone) 수도 프리타운의 룽기(Lungi) 국제공항. 아마드 테잔 카바(Ahmad Tejan Kabbah) 대통령은 장장 11년에 걸친 ‘아프리카의 가장 추악한 내전’의 종식을 선언한다. 그는 새로운 평화의 불꽃이라며 반군 무기 3,000여 점에 불을 붙인다. 그리고 말한다.

“권력을 폭력적으로 장악하는 것이 일상이 되고, 한 집단의 아집이 보편의 가치를 짓누르고, 대의민주주의가 참혹하게 짓밟히고, 부패와 무기밀매가 분노로 폭력으로 반복되는 한 아프리카의 평화와 번영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미래 세대는 다시 역사의 잔혹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시에라리온 민주주의의 아버지라 불리는 아마드 테잔 카바 전 대통령이 3월 14일 수도 프리타운의 서쪽 끝 중산층 마을 주바힐 자택에서 숨을 거뒀다. 향년 82세. 그는 시에라리온의 첫 민선 대통령으로서 쿠데타와 암살 위기, 두 차례의 망명 등 수난을 겪으면서 끝내 내전을 종식시켰다. 그는 ‘전장에 멈춰선 낡은 트럭(old and hardly running-truck parked in war zone)’같은 조국의 힘없는 대통령이었지만, 민주주의의 원칙이 작동하는 국가를 만들겠다는 신념을 실천한 강한 지도자였다.

1996년 2월 시에라리온은 역사상 첫 다당제 대통령 선거를 치른다. 1787년 북미 해방 노예들이 자치 염원을 담아 수도 이름을 프리타운(free town)으로 정해 건국한 나라. 영국 식민지(1808년)에서 1961년 독립하지만, 이어진 쿠데타와 독재, 부패와 가난. 96년 선거 역시 반정부세력인 혁명연합전선(RUF)의 위협 속에서 치러졌다.

독재에 대한 저항운동으로 시작된 RUF의 활동은 동부 다이아몬드 산지를 장악하기 위한 권력투쟁ㆍ이권전쟁으로 변질되면서 이웃 라이베리아에 거점을 둔 막강한 반군 세력으로 성장했다. 다이아몬드의 자금력과 무력을 업고 이미 스스로 ‘정부’였던 RUF는 92년 4월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군부와 산발적인 교전을 벌이고 있었고, 곧 출범할 민선 정부에 대해서도 사전 선전포고를 해둔 상태였다. 당시 시에라리온은 자구적 지역 민병대들이 다수 존재했고, 그 중에는 카마조르(KAMAJOR)와 같은 친정부계도, RUF의 하부조직과 다름없는 반구도 있었다. 남아공 용병회사의 조력으로 지탱되던 정부군 내부에조차 전(前) 군사정권과 연결된 군인들, 이른바 ‘소벨스(Sobels, soldier-cum-rebels)가 적지 않은 실정이었다.

그 와중에 치러진 선거에는 무려 13개 정당 후보가 출마했고, 카바는 시에라리온인민당(SLPP) 후보로 나서 결선투표를 통해 승리한다(득표율 59%). 취임 연설에서 그는 “이제 모두가 일터로 돌아가 신들이 뜻에 따라 평온하고 안전하고 번영하는 국가를 건설하자”고 역설했다. 하지만 정국은 대통령 자신조차 일터를 지키기 힘든 상황이었다.

카바는 1932년 2월 16일 동부 펜뎀부의 한 이슬람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기니 출신의 상인이었고, 어머니는 시에라리온 대부족인 멘데족 족장의 딸이었다. 그는 자서전 벼랑 끝에서 돌아오다(Coming Back from the Brink)(2009)에 어머니가 들려준 자신의 기이한(mysterious) ‘탄생 신화’-아프리카의 정치 지도자들의 자서전에 가끔 등장한다-를 소개하는데, 그는 왼손에 꾸란 한 조각을 움켜쥐고 태어났다고 한다. 독실한 무슬림이었지만, 그는 중등 과정을 수도의 가톨릭 학교(St Edward Secondary)에서 수학한다. 영국 웨일즈 애버리스위스(Aberresworth) 대학에서 경제학 학위(59년)를 받고, 69년에는 유서 깊은 영국 로스쿨 그레이 인에서 법학을 공부, 3년 만에 변호사 자격증을 딴다.

1950~60년대의 아프리카는 역사상 가장 역동적인 시기였다. 2차대전 후 아프리카의 많은 국가들이 독립하면서 많은 젊은이들이 잇달아 귀국, 정치와 행정 군사 엘리트로 활약했다. 콩고의 루뭄바, 가나의 은크루마, 세네갈의 레오폴드 셍고르, 탄자니아의 줄리어스 니에레레, 부르키나파소의 토마 상카라 등이 자신들의 젊은 이상을 펼쳤고, 더러는 비극적 운명을 맞았다.

카바 역시 그들 중 하나였다. 63년 31살의 그는 SLPP 정부의 통상산업부 차관이 되지만 67년 전인민회의(APC)의 군사쿠데타로 조국을 떠난다. 그는 72년부터 만 20년간 유엔개발계획(UNDP) 소속으로 아프리카 지역을 위해 활동한다. 동부아프리카 부본부장(Deputy Chief), 우간다 레소토 짐바브웨 탄자니아 케냐 UNDP 대표, 뉴욕 UNDP 본부 인사행정국장. 그는 특히 아프리카단일기구(OAU)의 지역 해방 지원 활동에 열성을 보였다고 한다.

그는 60세 되던 92년 은퇴하면서 ‘패트 아줌마(aunty Pat)’란 애칭으로 불린 아내 파트리샤 루시 카바와 영구 귀국, 프리타운 월폴 거리에 개인 법률사무소를 연다. 런던 유학시절 만나 63년 결혼한 두 사람은 은퇴 후 고국에서 법률사무소를 열어 가난한 이들을 위한 법률봉사를 하며 여생을 보내자는 약속을 해둔 터였다. 루시 카바 역시 변호사였고, UN 활동가였고, 또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두 사람은 결혼 당시부터 사별할 때까지 각자의 신앙과 가치관을 존중하며 독립적으로 살았다.

하지만 아내와 그의 UN 친구들이 카바에게 요구한 더 근본적인 다짐은 고국의 정치에 발을 담그지 말라는 거였다. 너무 위험하다는 게 이유였고, 코피 아난도 그 중 하나였다. 코피 아난은 카바가 대통령이 된 이듬해인 97년 UN사무총장에 취임, 2006년 퇴임할 때까지 시에라리온 내전의 짐을 카바와 나눠 지게 된다.

귀국한 카바는 조국의 현실 앞에 동요한다. 청년 시절 그가 몸담았던 SLPP 지도부도 그의 대선 출마를 끊임없이 종용했다. 루시는 이혼이라는 배수진을 치고 그를 말렸다. 진퇴양난의 카바를 도운 것은 프리타운의 시에라리온 대주교 조셉 간다(Joseph Ganda)였다. 간다 대주교는 코피 아난과 달리 카바의 출마를 권유한 쪽이었고, 간다 가문과 루시의 친정 투커 가문은 가톨릭 신앙으로 묶인 각별한 사이였다. 긴 대치 끝에 루시도 양보, 남편을 돕는다. 루시는 ‘자매 연합(Sisters Unite of Sierra Leone)’이란 조직을 만들어 정치 성향과 인종 종교 이념을 초월한 시에라리온 여성 지위 향상운동을 독자적으로 전개한다.(3.24, Cocorioko International Newspaper) 3년 뒤인 98년 5월, 루시 카바는 남편이 쿠데타를 피해 기니로 망명해 있던 사이 런던의 한 병원에서 지병으로 숨진다.

대통령 카바는 몽상가에 가까운 원칙주의자였던 듯하다. 그가 단행한 경찰 사법 개혁은 내전으로 누더기가 됐고, 화합 차원에서 내각 등 요직에 경쟁 정당 정치인들까지 대거 등용해 당 안팎의 거센 반발을 산다. 96년 말 카바는 하사관 출신의 RUF 반군 지도자 포다이 상코(Foday Sankoh)와 협상을 벌여 정전협정을 맺는다. 그 협정 역시, 카바의 희망과 달리, 또 주변의 우려처럼, 전후(前後) 20여 차례에나 맺어지고 짓밟힌 정전ㆍ무장해제ㆍ 평화협정 중 하나일 뿐이었다.

카바는 취임 14개월만인 97년 5월, 전직 소령 코로마(KOROMA)의 무장혁명위원회(AFRC)가 주도한 쿠데타로 기니로 도피한다. 코로마는 두 달 뒤 RUF를 수도로 끌어들인다.

망명지에서 카바는 라디오방송을 통해 국제사회의 지원 등 외교적 성과를 알리며 민심과 정부군의 사기를 북돋웠고, 쿠데타정부는 카바의 방송 청취자를 색출해 총살했다. 그는 9개월 뒤인 98년 2월, 나이지리아가 주도한 서아프리카경제공동체(ECOWAS) 산하 지역군(ECOMOG)의 지원으로 쿠데타군을 몰아내고 권력에 복귀한다.

내전기간 거의 내내 국제사회와 UN안전보장이사회의 활동은 무기력했다. 유엔 평화유지군 활동은 혼선을 거듭했고, 감시단 파견, 무기 및 다이아몬드 무역 밀거래 제재 조치 역시 선언적 의미에 그쳤다. 미국은 콩고내전으로 호된 시련을 겪은 뒤라 군사 개입에 부정적이었고, 종주국 영국의 입장 역시 막판까지 미온적이었다.

RUF 반군은 99년 1월 다시 프리타운을 공격, 수도 대부분을 장악하고 카바는 또 기니로 도피한다. 당시 상황을 그는 “새벽 3시에 자다가 일어나 보트로 프리타운 항구를 탈출, 나이지리아 군함으로 옮겨 탄 뒤 기니로 피신했다. 보트의 시동이 30여 분간 걸리지 않아 추격해온 반군의 총격을 받으며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했다”고 자서전에 적었다.

자신의 권력보다 평화를 우선시한 이 선량한 돈키호테는, 반군의 거듭된 배신과 자기 진영의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99년 7월 토고에서 RUF와의 권력 분점을 주 내용으로 하는 ‘로메 평화협정’에 다시 서명한다. 화해 없는 평화는 없고, 평화 없는 번영도 없다는 게 그의 신념이었다.

하지만 내전 종식은 그의 뜻과 달리 무력으로 성사된다. 2000년 토니 블레어 영국 정부는 자국민 보호를 명분으로 1,000여명의 공수부대원을 파병, ECOMOG군과 함께 유엔평화유지군을 지원하며 RUF 조직 와해의 실질적 전기를 마련한다. 내전 책임 면제, 무장해제 지원금 지급 등 당근책도 제시된다. 18개월 만인 2002년 1월 RUF는 공식적으로 와해된다.

2002년 5월 대선에서 70.1%를 득표, 재선된 카바는 비로소 자신의 소신을 펼쳐 나간다. 그는 진실화해위원회(Truth and Reconciliation Commission)를 구성, 내전 범죄행위를 규명하고, 대대적인 사면조치를 단행한다. 유엔과 시에라리온 정부의 프리타운 특별법원은 내전 전범 13명만 기소했고, 거기에는 친정부 민병대 카마조르의 리더이자 카바 정부의 각료까지 지낸 힝가 노르만 등도 포함됐다. 이스마엘 베아의 내전 체험기 집으로 가는 길에 기록됐듯, 소년병 강제 동원과 민간인 학살은 친정부 민병대도 자행한 범죄였다. 카바는 주변의 탄원에도 불구하고 끝내 재판 과정에 개입하지 않았고, 노르만은 옥사한다.

카바는 중임제 헌법에 따라 2007년 퇴임, 야당인 전인민회의의 어니스트 코로마에게 정권을 넘긴다. 그는 자유 언론을 위한 독립미디어위원회(Independent Media Commission), 반부패위원회(ACC), 국가사회보장기금(NASSIT), 대대적인 사법 법률개혁, 인권 및 국가안보시스템 정비 등을 정치적 유산으로 남겼고, 퇴임 후 케냐 짐바브웨의 선거 등을 감독하는 아프리카 연합 감시단 의장 등으로 활동하며 아프리카 민주화에 헌신했다.

정치ㆍ군사적 기반 없는 내란 국가의 수반이었던 카바는 위기 때마다 유엔과 우방의 힘에 기대야 했다. 안일한 사태 인식과 취약한 정보력, 우유부단함으로 희생을 키웠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시에라리온은 내전으로 20여만 명이 희생됐고, 5,000여명의 손발이 잘렸다. 50만 명 이상의 난민이 발생했고, 수많은 여성이 성적 학대를 당했다. 그리고, 카바 자신은 청빈했으나 관료들의 부패는 근절하지 못했다. 그는 경제 회복에도 실패했다.

하지만 다수의 시민들은 그의 이름에 ‘파(Pa 아버지)’를 붙여 부르며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는 대화와 타협, 과용과 화합의 정신으로 11년 내전의 험난한 세월과 내전 이후 분열을 치유했다. AYV(Africa Young Voices)의 보도처럼, 그는 뉴욕이나 런던에서 와인 잔을 기울이며 살 수 있는 삶 대신, 말 그대로 목숨을 걸고 대통령이 됐다. 내전 소식을 전하는 외신들은 언제나 UN이나 서방 주요 정치인의 이름을 주어로 앞세웠으나, 카바는 내전 내내 국민들을 절망하지 않게 붙든 구심점이었다. 그는 끊임없이 외세를 불러 들이면서도 자신이 앉을 독재자의 자리를 마련하지 않았다. 전 유엔 시에라리온 대사인 실베스트 로 박사는 BBC 인터뷰에서 “카바는 그의 자서전 제목처럼, 완벽한 파멸의 구렁텅이에 이른 시에라리온을 구출한 드라마의 진정한 주역이었다”고 말했다.

그가 사망하자, 정적 코로마 현 대통령은 7일간의 애도기간을 선포하고 조기를 게양토록 했다. 3월 23일 국장으로 거행된 장례식에서 코로마 대통령은 “고인은 언제나 극단주의자들과 맞섰고, 선한 싸움에만 임했으며, 보편의 이해를 추구하고 폭넓은 공통의 우정을 선물했다. 그는 우리의 종교적 관용, 민주주의와 평화를 위한 보다 커다란 염원을 심어주고 떠났다”고 추도했다. 그는 98년 예사추 자비 카바와 재혼, 다수의 자녀를 두었다.

최윤필기자 proos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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