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사람들을 만나면 병(病)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그만큼 나이를 먹었고 이곳저곳에 탈이 난다는 뜻일 게다. 그래서 옛글에서 병든 사람에 대한 위안의 글이 있으면 반갑다.
조귀명(趙龜命ㆍ1693-1737)이라는 글 잘하는 선비가 있었다. 그러나 평생 병을 달고 살았다. 머리끝에서 팔 다리 끝까지 병들지 않은 곳이 없었다. 큰일을 경영하는 것은 꿈꾸지도 못하였고 사소한 즐길 거리조차 쉽게 할 수 없었다. 다들 즐거워하는 명절에도 끙끙대거나 움츠리고 방안에 박혀 있어야 했다. 얼마나 가련한 인생인가?
그러나 조귀명은 질병을 달관으로 극복하고자 질병의 이해(病解)라는 두 편의 글을 지었다. 첫 번째 글은 벗이 건넨 위로의 말이다. 벗은 병이 오히려 조귀명을 도운 것이라 하였다. 그 근거는 이러하다. 천성이 예쁜 여자를 좋아하고 글짓기를 좋아하므로, 병이 들지 않았더라면 세상 미녀들을 찾아다니느라 탕자(蕩子)가 되었을 것이요, 좋은 글을 지으려다 발광하여 미치광이가 되었을 것이니, 병 때문에 목숨을 건진 것이 오히려 다행이 아닌가! 벗은 이렇게 조귀명을 위로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조귀명은 스스로 세 가지 위안을 찾아 두 번째 질병의 이해를 지었다. 첫째, 사람이 장수한다고 해 봤자 80~90년을 살지만 영겁(永劫)의 세월에 비하면 눈 깜빡 할 한 순간에 불과하다. 그러니 질병의 고통이 심하다 한들 그 얼마나 되겠는가? 이렇게 위안하였다. 한 발짝 물러나 생각하면 백 년 살았다 장수한 것이라 할 것도 없고 오십 년 살았다 요절한 것이라 여길 것도 없다. 소식(蘇軾)도 적벽부(赤壁賦)에서 인간을 두고 망망한 바다 속 한 알의 좁쌀 창해일속(滄海一粟)이요, 백 년 삶이 하루살이의 하룻밤과 다르지 않다고 하지 않았던가!
둘째, 세상에 귀한 팔진미(八珍味)도 매일 먹는 부유한 아이의 입에는 익숙하여 그다지 맛난 음식으로 여기지 않는다. 맛난 음식도 가난한 자들이 먹어보아야 그 맛을 아는 법이다. 맛을 모르는 자에게 맛난 음식이라는 것이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건강도 마찬가지다. 평생 질병의 고통을 겪어보지 않은 자들은 건강한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 생각하지 못한다. 그러나 병에 걸린 사람은 어쩌다 한 해 중에 하루가 건강하고, 하루 중에 한 시간 탈이 없으면 그 행복이 비길 데가 없으니, 그 경지를 건강한 자가 어찌 알 수 있겠는가? 잠시 질병의 고통이 없는 날, 바람 자고 비 그치면 두세 명 벗들과 나들이를 하면서 꽃구경을 하고 달구경도 하노라면, 그 통쾌함은 이루 비할 데가 없을 것이다. 이렇게 좋은 것을 건강한 자들이 어찌 알 수 있겠는가? 조귀명은 “남들이 가지지 않은 고통을 가졌다 하더라도 남들이 가지지 않은 즐거움을 가졌노라.” 병에 걸려 고통을 겪어 사람만이 깨달을 수 있는 달관의 경지다.
셋째, 온 세상 만물은 사는 것을 좋아하고 죽는 것을 싫어한다. 내 몸뚱이가 있으니 병이 생긴다. 내 몸뚱이가 없다면 병이 어디에 붙겠는가? 이 때문에 살아 있는 것이 즐거운 것이다. 더욱이 죽는 것도 겁을 내지 않는다면 무엇이 근심이랴! 사람들이 병을 근심하는 것은 병이 사람을 죽이기 때문인데 죽는 것도 싫어하지 않는다면 병이 무슨 근심이 되겠는가? 살아 있는 것 자체를 행운으로 생각하고, 아예 죽음까지 넘어선 달관의 마음으로 병든 자신을 위로했다.
나쁜 일이 닥친다 한들, 세상사 마음먹기 나름 아닌가? 조귀명의 글은 발상의 전환에 능하다. 그림을 보고 쓴 글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사람들은 그림 속의 물이 흐르지 않고 바람이 불지 않으며 나뭇잎이 시들지 않는다고 탓한다. 나는 그림을 위하여 이렇게 따진다. 물이 있는데 흐르지 않게 할 수 있는가? 바람이 있는데 불지 않게 할 수 있는가? 나뭇잎이 있는데 시들지 않게 할 수 있는가? 이는 조물주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림에서는 할 수 있다.”
질병의 고통을 발상의 전환으로 달관의 경지에 오른 그의 글이 아픈 사람의 마음을 푸근하게 한다. 혹 즐거워야 할 자리에서 병을 앓는 이야기가 나오면 조귀명이 남긴 위안의 말을 들려줄 일이다.
이종묵 서울대 인문대 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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