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문화/
우리에게 폴이 필요한 이유
원동연
리얼라이즈픽쳐스 대표이사
2000년 대한민국 최초로 소방재난영화를 표방한 ‘싸이렌’의 프로듀서를 맡았었다. 한국영화 최초로 불을 소재로 영화로 만들기에 실감 나는 화재장면과 폭발장면을 구현해 줄 특수효과책임자로 우리보다 훨씬 경험이 많고 과학적인 시스템을 갖춘 헐리우드 스텝을 채용하기로 했다.
하지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예산으로 헐리우드 스텝을 고용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으나 다행히도 헐리우드에서 활동하는 폴을 데려올 수 있었다. 폴은 헐리우드에서도 20여년이 넘게 ‘특수효과감독’으로 일해온 베테랑이면서도 전처가 한국인이었고 전처 사이에서 낳은 한국계 혼혈아들을 뒀다는 이유로 한국에 대해 큰 애정을 갖고 있었다.
폴은 자신이 받아야 할 개런티보다 훨씬 적은 금액인데도 한국에서 영화 일을 한번 해 보고 싶었고, 한국에 자신이 가진 노하우와 경험을 전수해주겠다는 고마운 마음으로 우리 영화에 참여해주었다.
제작진은 그런 폴의 마음에 감동하였음은 물론 다양한 특수효과를 배울 수 있고 또 영화에 헐리우드 최고의 기술을 담을 수 있다는 기대감에, 정말 천군만마를 얻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촬영이 시작되고 나서는 난 폴이 아주 못마땅해졌다. 폴은 너무나 엄격했다. 감독이 원하는 앵글이나 카메라포지션, 그리고 연기의 방향을 일일이 반대했다. 그건 그가 감독의 연출에 개입한 것이 아니라 단지 위험하다는 이유에서였다.
감독과 제작진은 좀 더 실감 나는 장면을 화면에 담고 싶었으나 폴은 불이 나오는 특수효과 1m 이내에 연기자가 들어오는 걸 절대 용납하지 않았다. 한국 스텝들은 “그간 우리는 불에 근접해서도 촬영을 했다”고 주장했지만 폴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폴은 가스(영화에서 화재 장면은 휘발유가 아닌 가스로만 사용한다)밸브를 절대로 넘겨주지 않았다. 한 번은 좀더 실감 나는 장면을 보이고 싶어 했던 스턴트맨이 폭발장면에서 폴이 지정한 위치보다 더 앞으로 나아가 연기를 하자 폴은 미친 듯이 화를 내면서 지체없이 가스밸브를 잠그고는 현장을 떠나버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와 갈등이 깊어졌다. 폴이 연출한 불이나 폭발장면이 좀 더 위험하게 보이길 바라는 제작진과 연기자의 안전이 가장 중요한 폴과는 절충점을 찾아낼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차량전복장면을 촬영하다가 트럭이 예상치 않은 방향으로 전복되었다. 나를 비롯한 모든 스텝들은 순간 얼어붙었다, 차량에 불이 붙고 위험한 상황에서 폴은 가장 먼저 특수소화기를 가지고 1초의 주저함 없이 트럭으로 달려들어가 불을 진압하고 스턴트맨을 구출해 나왔다. 폴이 스턴트맨을 데리고 나올 때 모든 스텝들은 박수를 치며 그에게 감사를 표했다.
다행히 그날 촬영을 마치고 폴과 나는 맥주를 한잔했다. 나는 폴에게 물었다, “아까 위험한 상황인데 당신이 소화기를 가지고 달려갈 때 놀랐다. 솔직히 겁나지 않았니?” 그러자 폴은 진지하게 대답했다.
“내 현장(그는 항상 ‘내 현장’이라는 표현을 쓴다)에서 좋은 그림, 실감 나는 그림을 만들지 못한 것은 내가 인정할 수 있고 반성할 수 있다. 그러나 내 현장에서 누군가가 다친다는 건 내가 절대 용납할 수 없다.”
난 그의 말을 듣는 순간 폴의 모든 것이 이해가 되었고, 그가 얼마나 확실한 프로페셔널인지 알 수 있었다. 그날 이후 우리 제작진은 폴의 말에 절대 순응했으며 촬영도 다행히 무사하게 마칠 수 있었다.
우리나라엔 그간 ‘하면 된다’의 정신이 있었다. 기술이 없고 돈이 없고 안전이 담보가 안 돼도 국민의 열정과 희생으로 ‘하면 된다’는 정신으로 밀어붙이는 전근대적이며 위험하기 짝이 없는 그런 정신이 있었다. 나는 폴을 통해 ‘하면 된다’가 얼마나 무모한 것인지를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지금 전 국민이 진도 앞바다에서 수많은 학생, 승무원, 승객들의 기적을 바라고 있다. 전 국민이 그들의 무사 생환을 기도하고 또 기도한다. 하지만 우리에겐 그런 기도보다 폴이 필요하다. ‘하면 된다’가 아닌 안전이 담보가 안 되고 준비가 안 되면 가스 밸브를 잠가버리는 그런 폴이 필요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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