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바다로 내려가는 아홉계단, 완도 구계등 "쏴아아~ 차르르~" 파도의 노래·갯돌의 화음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바다로 내려가는 아홉계단, 완도 구계등 "쏴아아~ 차르르~" 파도의 노래·갯돌의 화음

입력
2014.04.16 12:26
0 0

바다로 내려가는 아홉 계단이다. 전남 완도군 완도읍 정도리 구계등(九階嶝). 오래 전 책에서 읽은 그곳에 갔다. 물때가 조금에 가까워서 뭍으로 드러난 층계참이 좁았다.

'정도리 바닷가엔 모래가 한 점도 없어요. 청환석(靑丸石)이라고 해서 푸른 돌들이 해안을 따라 죽 깔려 있죠. 해안선이라고 해 봐야 기껏 7백 미터 밖엔 안 되지만 돌밭이 바닷속으로 아홉 고랑을 이뤄 내려가 있다고 하니 장관인 셈이죠. 그래서 구계등이라고 부르는 겁니다.'(윤대녕 '천지간')

가끔 구계등이 신문에 등장한다. 그 가끔은 3, 4년에 한 번씩, 큰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반복된다. 최근은 2012년 여름이다. 제14호 태풍 덴빈, 제15호 볼라벤, 제16호 산바가 잇달아 남해안을 훌치고 갔을 때 구계등의 청환석은 모조리 바닷속 깊숙이 쓸려가 버렸다. 꺼슬한 모래사장으로 변해 정취를 잃어버린 구계등. 그러나 유실도, 복원도 이곳에선 모두 자연적이다. 민둥민둥해진 해안이 저절로 제 모습을 찾는 데 채 반년이 걸리지 않았다. 그건 1만년을 되풀이한 파도의 일이었다.

이 갯돌해변은 40여년 전 문화재(명승 제3호)로 지정됐다. 전국에서 셋째로 꼽힐 만큼 풍광이 빼어났다기보다 그만큼 오래 전부터 주민들의 사랑을 받았다고 이해하는 게 맞을 것이다. 완도항에서 딱 십리 거리. 전라남도 바닷가 주민들의 오래된 사진첩 속에 구계등은 학교 소풍지든, 여름 피서지든 한 번은 등장한다. 교통이 발달되기 전, 변변한 구경거리가 없던 시절의 추억이다. 그래서 그 사진들은 대개 빛바랜 흑백이다. 이제 그다지 멀지 않은 지역 어린 학생들에게도 구계등이라는 이름은 낯설다.

밟히는 건 전부 돌이다. 물에 젖어 데굴데굴 구르는 갯돌은 바둑알 또는 달걀만 하다. 물에서 조금 먼 것은 주먹이나 사람 머리만 하다. 방풍림 바로 앞엔 농구공보다 큰 것도 있다. 하지만 파도에 깎여 동글동글한 생김새는 똑같다. 1만년 전 마지막 빙하기가 끝났을 때, 100m 아래에 있던 수평선이 이곳까지 들이닥쳤다. 그때 바다가 밀고 온 바위가 쉼 없이 구르고 깎여서 지금 갯돌해변을 이루는 청환석이 됐다. 물수제비뜨는 머슴애들도 드물어 내내 평온한 둥근 돌들은, 이제 정도리 어민들이 바다에서 건져낸 것을 말리는 건조대로 쓰인다.

차르르르르르~. 사람 없는 해변엔 밀려오고 쓸려 나가는 바다가 돌을 굴리는 소리만 가득했다. 낮고 넓고 고른 소리였다. 너무 깊이 밀려들어와 달의 인력을 놓쳐버린 바다는 푸른 돌들 틈에서 하얀 기포로 잦아들었다. 가까이 귀를 대니 거기서도 여린 소리가 났다. 스아아~. 아기의 하품만 한 소리였다. 해변을 걸으며 보니 마른 돌은 검은 색에 가까운데 젖어서 빛을 튕겨내는 면의 번들거림이 푸르렀다. 모서리를 둥글게 지워내는 시간의 검질김이 결국 세상을 빛나게 하는 것일까. 그런데 시간이 이 푸른 돌들을 모래로 만든 뒤에도, 바다로 내려가는 계단이 이곳에 남아 있을까…구계등은 무연한 시간을 하염없이 생각하게 만드는 해변이었다.

갯돌해변의 너비는 80m 정도 된다. 그 안쪽은 뜻밖에 꽤나 울울한 숲. 바닷바람의 염분으로부터 농작물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인공림이다. 조성한 지 300년 정도 된 것으로 알려졌다. 소나무, 참나무, 생달나무, 서어나무, 단풍나무 등 230여 종의 나무와 풀이 자란다. 내륙에서는 보기 힘든 상록활엽수가 많다. 연평균 기온 14도 이상이라는 생육조건에 정도리가 부합하기 때문이다. 눈여겨봐야 할 나무는 생달나무다. 키가 우쭐하게 큰 상록수인데 지금은 비중이 크지 않다. 하지만 숲의 천이 과정에 따라 방풍림은 점점 생달나무 숲으로 변화해가는 중이다. 100년 혹은 200년의 시간이 흐른 뒤 이곳 구계등은 갯돌해변 못지않게 사철 푸른 생달나무 숲으로 인식될 것이다. 방풍림 가운데 산책로가 나 있어 바닷바람에 섞인 피톤치드를 들이킬 수 있다.

●구계등은 다도해해상국립공원에 속한 명승지다. 자연해설 프로그램 '갯돌소리 들리는 정도리 구계등'이 연중 진행된다. 오전10~낮12시, 오후2~4시. 전화로 예약하면 된다. 무료. 국립공원 다도해해상관리사무소 정도리탐방지원센터 (061)554-1769

유상호기자 shy@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