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에 원장으로서 참담하고, 책임을 통감한다."
남재준 국가정보원장은 15일 오전 10시 서울 서초구 내곡동 국정원 홍보관에 기자들을 불러 놓고 간첩사건 증거조작 관련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했다. 그러나 그는 딱 3분이 걸린 사과문 낭독을 마친 뒤 질문도 받지 않은 채 서둘러 자리를 떴다.
'머리 숙여 사과' '뼈를 깎는 개혁 추진' '강도 높은 쇄신책 마련' 등 의례적인 수사를 동원했을 뿐 알맹이가 없는 사과문 내용도 문제지만, 제 할 말만 쏟아놓고 휑하니 나가버린 행태를 두고 "사과의 진정성을 느낄 수 없다"는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이날 남 원장의 기자회견은 검찰의 수사결과가 발표된 전날 밤 급하게 결정됐다. 국정원은 오후 10시가 넘어 검찰청 등을 출입하는 법조기자단에 문자를 보내 내곡동 본원에서 남 원장이 입장을 발표한다고 알려왔다. 국정원 취재 담당이 아닌 법조 기자들을 불렀다는 점에서 이례적이었다. 그리고 이날 오전 검찰청사로 버스를 보냈다.
기관에서 기자회견을 자청할 경우 충실히 취재에 응하고 질의응답을 받는 것이 기본이지만, 국정원은 어떤 질문도 허용하지 않는 등 일방통행으로 내달렸다. 남 원장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꼿꼿하게 선 채 미리 준비해 온 원고를 읽어 내렸다. 그는 사과문을 낭독하는 동안 세 차례 고개를 숙였지만, 질문을 받으라는 기자들의 요청을 들은 척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회견장을 빠져 나갔다.
50여명의 취재진은 30여분 가까이 신원과 반입물품 확인을 거쳐 회견장에 들어갔지만, '3분짜리 원맨쇼'만 보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결국 신문이나 방송에 나갈 사진과 영상 등 '그림의 한 구석'을 채우기 위한 들러리 용도로 기자들을 동원한 셈이다.
하경준 국정원 대변인은 "국민에게 진솔하게 사과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자리라 질의응답은 받지 않겠다"고 했다. "그럼 왜 불렀나. 방송 그림 때문에 불렀냐"는 취재진의 항의가 빗발치자, 하 대변인은 "양해를 해달라"는 말만 반복했다.
남 원장은 특히 사과문에서 증거조작 범죄를 '일부 직원들'의 '개인적 일탈'로 치부하는 주장을 바탕에 깔고 개혁의 구체적인 방향도 제시하지 않았다. 사건과 직접 관련이 없는 북한의 미사일 발사와 서해 북방한계선(NLL) 도발 등 안보 상황을 강조하기도 했다. '엄중한 안보상황'을 들어 스스로 물러날 뜻이 없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
남상욱기자 thot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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