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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의 추억

입력
2014.04.15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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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끼리 주먹질할 일이 생기면 먼저 다짐받던 게 있었다. 어른들에게 일러바치지 않기, 돌을 들지 않기. 사실 그건 또래들의 불문율 같은 거여서 확인할 필요조차 없었다. 다른 아이들은 빙 둘러서서 제 친구를 응원하는 동시에 룰이 준수되는지 감시했다. 그들은 지는 것 못지않게 비겁하게 이기는 걸 부끄럽게 여겼다.

어른에게 고자질하지 말자는 건 독립적인 주체로서 맞서자는 뜻이고, 돌을 들지 말자는 건 신사적으로 싸우자는 의미다. '애들 장난' 같은 싸움에는 그렇게, 중세 기사들의 결투를 방불케 하는 비장함과 낭만적인 멋이 있었다. 아이들은 각자의 정의(正義)를 걸고 싸우면서도 형식의 정의를 중시했다.

그 시절 내 동네에는 내로라하는 싸움꾼들조차 슬슬 피하던 아이가 있었다. 다운증후군을 가진 그 아이에게는, 자신을 괴롭히던 아이의 엉덩이를 물어 끝내 살점을 떼어냈다는 전설이 따라다녔다. 돌이켜보면 사실무근이거나 과장일 게 뻔한, 아마도 어른 중 누군가가 그 약하고 순한 아이를 개구쟁이들의 해코지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지어냈을 이야기였지만, 그 전설의 허술함을 일깨워준 어른은 없었다. 배려라는 게 뭔지조차 몰랐던 개구쟁이들이 그 아이를 결과적으로 '배려'한 것은 우선 전설의 이빨이 두려운 까닭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룰과 기사도가 통하지 않는 상대와는 싸울 수 없고 싸워선 안 된다는 생각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일본 만화가 니시모리 히로유키(西森博之)의 에 열광하던 때가 있었다. 만화의 매력 포인트는 싸움꾼인 주인공 '미츠하시'의 캐릭터였다. "나(미츠하시)는 강하다. 그리고 비겁하다. 그래서 무적이다."실제로 그는 싸움도 잘하지만 필요하다면 교활한 짓도 서슴지 않는, 악당보다 더 악당처럼 싸운다. 그가 싸움이 주는 쾌감은, 반칙을 일삼는 상대에 맞서 피투성이 얼굴로 끝까지 룰을 지키던 '우리 편' 레슬러가 막판에 기적적으로 판세를 뒤집을 때의 쾌감과는 달랐다.

요컨대 그는 정의롭고 따뜻하지만 으스댈 수 있는 영웅은 아니다. 나는 미츠하시의 비겁한 승리를 리얼리티의 승리라 여긴다. 형식의 정의를 고수하다 막판에 치명상을 입거나 소중한 누군가를 잃고 마는, 그래서 절규하는 할리우드 영화의 대단원 같은 현실을 나는 아직 경험하지 못했다. 알파에서 오메가까지 흠집 없이 미끈한 정의의 리얼리티도 나는 믿지 않는다. 실질적 이해에 발을 담근 싸움일수록 형식의 정의는 왜소해지기 마련이고, 승리의 과실은 윤리적 승리보다 훨씬 달콤하다는 것을, 나이를 먹는 동안 질리게 듣고 보고 겪어온 탓일지도 모른다.

사실 어른들의 싸움의 룰은 아이들의 그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정교하기 마련이다. '계급장'을 떼야 할 때도 있고, 법적ㆍ경제적 책임을 묻지 말자는 약속을 전제해야 할 때도 있다. 물론 하나마나 한 약속이다. 떼잔다고 떨어지는 계급장도 아니고 덮잔다고 덮이는 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애당초 법이 기만적이고 법치가 편파적인 경우도 많다. 그래서 어른들은 싸움 자체보다 룰과 심판에 대한 환멸 때문에 싸움을 피한다. 미츠하시처럼, 스스로 비열해지면서까지 악을 응징해줄 누군가를 기다리면서. 대신 싸움에 임하면 무조건, 일단은 이기고 보자는 식이 된다. 내가 경험한 거의 모든 선거가 그러했다.

나는 지방선거 공천을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공천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엉터리 공천이 문제라는 식의 비판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그럴싸하지만 하나마나 한 말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새정치민주연합의 무공천 번복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건 아니다. 그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번복하기까지의 긴 머뭇거림과 안철수 공동대표의 헛발질을 두고 들리는 이런저런 비아냥에는 귀를 닫고 싶다. 안 대표의 정치적 속셈이 뭐든, 약속을 부인하는 자리에서 보인 그의 굳은 표정과 머뭇거림이 한국 정치에서는 볼 수 없던 순정 같아서 나는 보기 좋았다. 현실을 핑계로 되풀이되는 쉬운 선택에 새로운 미래란 없고, '새정치'라는 게 정말 있다면 그런 머뭇거림을 통해서만 가능하리라 여기기 때문이다.

최윤필 기획취재부장 proos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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