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열풍에 인문정신이 죽어간다." 이 말을 들으면 고개를 갸웃거릴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각양각색의 인문학 교양서들이 출간되고, 인문학 강좌는 수많은 대중들을 불러 모은다. CEO를 위한 다양한 인문학 프로그램이 개발되고, 정부조차 창조경제를 위해선 인문학이 필요하다고 목청을 높인다. 반가운 일이고, 환영할만한 일이다. 나도 인문학의 대중화라는 명분을 내세워 부지런히 강연도 다니고, 과학기술이 21세기의 종교로 숭배되는 시대에 사람 냄새 나는 사회를 건설하려면 인문과 기술이 융합되어야 한다고 주장해온 명색이 인문학자이기 때문이다.
환영할만한 일인데 마음이 불편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우리시대를 관통하고 있는 이 문화적 현상에 대해 나는 두 가지 상반된 감정을 갖고 있음에 틀림없다. 나는 15년 전 란 책에서 "인문학이 죽어야 인문정신이 산다"고 역설한 적이 있다. 인문학이 학문과 학과라는 폐쇄적인 틀로부터 해방될 때 비로소 우리의 구체적인 삶과 소통할 수 있다는 취지였다. 그런데 말이 씨가 된다고 그랬던가. 대학에서는 '인문학'이 죽어가고, 거리엔 '인문정신'이 흘러넘친다.
나의 불편하고 불안한 마음은 인문학 열풍이 인문학 르네상스로 이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에서 비롯한다. 두 가지 의문이 든다. '거리의 인문학'은 정말 인문정신을 활성화하고 고양시킬까? 사람들은 언제부터인지 강단 인문학자와 거리의 인문학자를 구별하기 시작했다. 진정한 인문학자라면 강단과 거리로 구별될 리 없을 터인데 누가 이렇게 구별한 것일까? 의문이 쓸데없는 의심으로 바뀌지 않으려면, 이 기괴한 현상을 조금 더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강단 인문학은 어렵고, 거리 인문학은 쉽다고 한다. 거리 인문학자의 책은 읽히고, 강단 인문학자의 책은 읽히지 않는다.
간단히 말하면 거리의 인문학은 잘 팔린다. 여기서 우리는 거리가 다양한 사람들과 대화하고, 소통하고, 토론하는 소크라테스적 '광장'이 아니라 인문학적 상품을 사고파는 자본주의 '시장'이라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물론 팔리는 책을 탓할 일은 아니다. 나도 나의 책이 많이 읽히고 팔렸으면 좋으니까. 시장에서는 더 빨리 소비되는 상품이 더 많이 팔린다. 거리의 인문학은 소비상품이다. 그래서인지 거리의 인문학은 웰빙, 힐링과 같은 유행을 따르고, 숨찬 소비자의 욕구에 맞춰 호흡이 짧다. 거리의 인문학 책은 대개 여백이 많고, 행간 간격이 넓고, 단숨에 읽어낼 수 있도록 장별 텍스트는 몇 페이지를 넘지 않는다. 신속하게 소비될 뿐 토론은커녕 성찰과 사색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나의 두 번째 의문은 더욱 심각하다. 거리의 인문학열풍이 강단 인문학 파괴의 알리바이로 사용되지 않을까? 정부는 학령인구가 감소하는 미래에 대처하기 위해 대대적인 대학의 구조조정을 감행하는 모양이다. 이제까지 정부정책이 항상 그랬던 것처럼 개혁의 방향과 철학이 분명치 않은 상태에서 진행되는 구조조정은 항상 정원감축으로만 이해되었다. 돈줄을 쥐고 있는 정부가 재정지원의 기준으로 정원감축을 내세우는 상황이니 대학에게 장기적인 방향과 비전을 요구하는 것도 무리이다. 이런 구조조정 광풍의 최대 희생자는 두말할 나위도 없이 인문학이다. 여기서도 문제는 돈이다. 돈이 몰리는 학과는 유지 발전되고, 연구비를 받을 수 없는 학과는 폐지된다. 인문학이 거리에서 열풍을 일으킨다는 알리바이로 대학에서는 인문학 분야의 학과가 하나씩 사라지거나 축소되고 있다.
돈이 시장에서는 인문학 열풍을 가져오고, 대학에서는 인문학 죽이기의 광풍을 불러일으킨다. 니체는 대중과 시장, 즉 돈이 결정권을 행사하는 곳에는 어디서나 '진정함'이라는 것은 불필요하고 해로우며 냉대 받게 된다고 말하면서 이를 데카당스 문화라고 비판한다. 모두가 가벼운 것만을 추구한다면 누가 삶의 진정한 문제를 성찰하고 연구할까? 대학에서 인문학이 죽는다면 멀지 않은 미래에 누가 거리로 나갈 수 있을까? 인문학 데카당스에 인문정신의 싹마저 시들까 몹시 걱정된다.
이진우 포스텍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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