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정부가 테헤란 미국 대사관 점거(1979~81)에 관여했다는 이유로 하미드 아부탈레비 유엔 주재 이란 대사 내정자에 대한 비자 발급을 거부했다. 이에 이란이 "유엔 대사 내정자 교체는 없다"고 맞서면서 국교 단절 30여 년 만에 찾아온 양국의 화해 분위기가 깨질 위기에 처했다. 자칫 이란 핵협상에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제이 카니 백악관 대변인은 11일 "유엔과 이란에 아부탈레비의 미국 입국 비자를 발급하지 않겠다고 통보했다"고 밝혔다. 7일 상원에 이어 전날 하원에서 과거 테러나 간첩 활동에 관여한 유엔 주재 외교관에게 비자 발급을 거부할 수 있도록 한 법안이 통과된 지 하루 만이다. 카니는 "의회 승인을 받은 법안 취지에 전적으로 공감하며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합헌성 여부를 검토한 뒤 법안 서명 여부를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문제가 미국 등 6개국과 이란 간에 진행 중인 핵협상에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란은 즉각 유엔 주재 대표부 성명을 통해 "주권국의 고유한 권리를 침해한 국제법 위반 행위"라며 반발했고 이튿날은 핵협상 실무대표인 압바스 아락치 외무차관이 나서 "아부탈레비 내정자를 교체하지 않을 것이며 유엔 내 법적 기구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밝혔다. 아부탈레비도 "전례없는 국제협약 위반 행위"라며 미국을 비난했다. 이란은 유엔본부 소재국인 미국에 대해 유엔 주재 대사관의 비자 발급을 의무화한 1947년 유엔 협약을, 미국은 자국 안보에 위협적인 인물의 입국을 거부할 수 있도록 한 국내법을 각각 법적 명분으로 내세우고 있다.
중간선거를 앞둔 미국 의회가 강경 대응을 주도하는 가운데 이란에서도 하산 로하니 정부의 외교적 유화책에 반발하는 강경파가 아부탈레비 내정 철회를 극력 반대할 것이란 전망이 나오는 터라 사태가 장기화될 가능성이 적지 않다. 이럴 경우 미국과의 실질적 외교 통로 역할을 해온 이란 유엔 대표부의 기능이 마비되면서 양국 관계에 타격을 줄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특히 이란이 이번 사태를 핵협상 보이코트의 명분으로 삼을 경우 국제적 긴장이 조성될 수 있다. 이란과 서방은 다음달 13일 재개되는 실무협상에서 이란 핵문제의 포괄적 해결방안을 담은 합의문 작성에 착수할 예정이다. 젠 사키 미 국무부 대변인은 이와 관련 "이란에게 핵협상은 경제제재를 피하기 위한 방편이기 때문에 협상을 깰 가능성은 적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이 아부탈레비의 입국을 봉쇄하는 강수를 두면서 이란에 내정 철회를 압박하는 데는 테헤란 대사관 점거 사태에 대한 미국의 뿌리 깊은 분노가 배경에 있다. 대사관 직원 등 52명이 인질로 붙잡힌 이 사태는 무려 444일 동안 지속됐고 1980년 4월 단행된 미군의 인질구출 작전은 특공대원 8명의 사망이라는 처참한 실패로 귀결됐다. 뉴욕타임스는 "인질 사태 장기화는 지미 카터 대통령의 재선 실패와 로널드 레이건 보수정권 출범으로 이어지며 미국 정계의 씻기지 않는 상처가 됐다"며 "2012년 당시 상황을 다룬 영화 '아르고'가 인기를 얻으며 대중적으로도 이슈가 된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이훈성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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