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슷한 다른 사건과 비교해 법원의 처벌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11일 각각 징역 10년, 15년형을 선고받은 경북 칠곡과 울산 계모의 의붓딸 학대 사망 사건 판결을 말하는 것이다. 여론에 따라 법원의 판결이나 양형이 들쭉날쭉해서도 안 될 것이다. 자칫 증거보다 감정에 떠밀려 억울한 피고인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판사가 제멋대로 선고하는 바람에 나만 억울하게 처벌받는다는 인식이 퍼진다면 아무도 사법부를 존중하려 들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번 판결에 수많은 부모들이 분노하는 것은 법을 모르는 무지렁이들의 감정적 반응에 불과할까?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 반대로 우리 사회의 법과 양형 기준, 또 그것을 만들고 운영하는 국회와 판ㆍ검사들이 놓치고 있는 게 있다.
첫번째는 아동 상해치사의 처벌 대상을 '사망에 이르게 한 직접적 폭행'으로 한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아동 학대치사는 한 차례 폭행으로 빚어진 경우가 드물다. 통상 어린 자녀(여성, 노인, 장애인도 마찬가지다)에 대한 보호자의 폭행은 상습적이며, 반복될수록 강도가 심해진다. 아무도 보지 않는 집 안에서 저항할 힘이 없는 아이를 때리다 보면, 아이를 제 맘대로 해도 된다는 악의 본능이 활성화하는 탓이다. 그러다가 조금 심하게 때린 어느 날 아이는 죽어나간다. 그러니 장기간에 걸쳐 반복된 폭행을 연속적으로 고려하지 않은 채 사망에 이르게 한 마지막 폭행만을 상해치사로 처벌하는 우리의 형법은, 꼭 아이가 죽어야만 처벌이 가능해지는 아이러니에 빠지게 된다.
'흉기를 준비해야 살인죄'라는 식의 판단 역시 법조계 안에서만 통용되는 인식일 뿐이다. 울산 사건에서 재판부가 살인죄를 적용하지 않은 이유 중 하나가 '집 안이라 흉기를 쓸 수도 있었지만 손과 발만으로 구타했다'는 점이었다. 때리는 손을 막을 힘이 있고 경찰에 신고할 줄도 아는 성인이라면 치밀하게 흉기를 준비해야 목숨을 앗을 수 있겠지만, 어린 아이의 신체는 손과 발을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뼈를 부러뜨리고 숨이 끊어지게 할 수 있다. 노약자를 보호해야 하는 게 이런 이유 때문 아닌가.
현행 사법체계 내에서 판결을 내린 판사들을 비난할 수는 없으나, 사법체계 자체는 분명 문제가 있다. 법과 양형기준은 가정폭력의 특성에 무지하거나, 또는 그 현실을 외면하고 있다. 흉기를 쓰지 않아도 삶의 꽃봉오리가 무참히 꺽일 수 있는 아이들을, 죽일 생각으로 때려야만 살인이라고 판단하는 무자비한 법이다.
아동에 대한 학대치사는 여느 상해치사보다 엄히 처벌하는 것이 옳다. 양형의 형평성, 처벌의 예측가능성, 물론 고려해야 한다. 그러면 이제 아동학대 끝에 발생한 치사 사건은 살인에 준할 만큼 엄벌하는 양형기준을 세우도록 하자. 살인의 의도를 따져 살인죄를 적용하는 것은 그만둬도 된다. 대신 상습 학대가 있었는지를 더 중요하게 따져서 그것만으로도 중형을 피할 수 없도록 하자. 훈육이라는 명분 아래 아이를 때리다간 오래도록 아이를 못보게 된다는 예측을 누구나 할 수 있게 하자.
가중처벌만으로 아동학대를 해결할 수 없다 해도, 최소한 이런 노력이 아직 죽지 않은 옆 집의 학대 피해 아동에게 새 인생의 기회를 줄지 모른다고 믿는다. 학대ㆍ성폭력 피해 아동을 돌보는 해바라기아동센터 직원들은 아이가 죽어야 지원이 늘어난다는 점에서 '아이들의 희생으로 만들어진 기관'이라고 일컫는단다. 이만큼 아이들이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으면 우리 사법부도 근본적으로 성찰하고 개선하지 않으면 안 된다. 국민들이 왜 이렇게 분노했는지 그 심각성을 모르거나 알고도 어쩔 수 없다고 손쉽게 체념한다면 그것은 사법부의 직무유기이자 국민에 대한 배신이다. 우리에게 운명을 통째로 내맡긴 대상과 어떤 관계를 맺느냐는 것이 인류의 진정한 도덕적 실험(밀란 쿤데라 )이라는 표현을 빌어, 그것은 우리 사회 도덕성의 무참한 실패라고 말하고 싶다.
김희원 사회부 부장대우 h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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