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내 전쟁박물관 '유슈칸' "죽어서 야스쿠니서 만나자"가미카제 전투기도 버젓이분향소 찾은 20대 日청년 "총리 참배가 침략전쟁 계승?배운적 없고 생각 안해봤다"美도 인정한 순수 참배시설인 '지도리가후치 묘원'은 소규모대체시설 건립 주장 나오지만 자민당 측 반대로 진전 안돼
일본 도쿄 지요다구 구단시타 야스쿠니(靖國) 신사는 군국주의의 상징이면서도 도쿄의 대표적 벚꽃명소이자 행락지라는 두 얼굴을 지녔다.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은 일왕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면 누구나 신이 될 수 있다는 논리를 펼치며, 전쟁에서의 죽음을 화려하게 피었다가 사라지는 벚꽃의 이미지로 치환시키는 데 성공했다.
야스쿠니의 두 얼굴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시기는 4월 초 벚꽃축제시즌과 8월 15일 이다. 일본의 항복으로 전쟁이 끝난 날에 야스쿠니는 군국주의의 부활을 부르짖는 우익세력의 해방구가 된다. 벚꽃시즌에는 상춘객의 흥이 넘쳐나는 전형적인 도심 공원이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지난 해 12월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한 이후 한국, 중국, 미국 등 주변국가의 반발이 거셌고 우익 세력들은 부당한 간섭이라고 역반발하고 있다. 일본내에서도 야스쿠니 신사의 자리매김에 대한 논란이 재점화하고 있다. 일부 시민단체는 아베 총리의 야스쿠니 참배가 전쟁을 미화했다며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고 또 다른 시민단체는 아베의 야스쿠니 참배가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명시한 헌법20조 위반이라며 위헌소송을 준비중이다. 이런 논란을 비웃듯 신도 요시타카 총무장관은 12일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고, 아베 총리는 21~23일 춘계예대제를 앞두고 공물봉납 형식을 빌어 간접 참배를 결정했다.
야스쿠니의 본질적 문제점을 무엇일까. 벚꽃축제가 막바지에 달했던 5일 야스쿠니 신사를 찾았다.
야스쿠니의 첫 이름은 쇼콘샤(招魂社)
신사의 입구에 우뚝 선 도리이(鳥居ㆍ신사 입구의 기둥 문)를 지나자 도쿄의 개화시기를 알리는 표몬목 벚꽃 주위로 잔뜩 차려 낸 음식을 나눠 먹으며 벚꽃놀이에 취한 행락객들이 넘쳐났다.
신사 정면에 마련된 일반인 분향소에서 참배를 마치고 나오는 20대 청년에게 아베 총리의 야스쿠니 방문과 한국, 중국의 반발, 미국의 '실망' 반응 등 야스쿠니 신사의 단상을 조심스레 물었다. 그는 "종교시설인 야스쿠니에 일국의 총리가 방문하는 것에 대해 주변 국가의 반응이 너무 민감한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주변 국가가 민감한 것은 야스쿠니에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A급 전범 14명이 합사돼 있으며 이 곳에 총리가 참배를 하는 것은 과거 침략전쟁을 계승하겠다는 의미로 해석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더니 그는 "그런 내용은 배운 적이 없고 깊이 생각해보지도 않았다"며 말을 흐렸다.
1869년 처음 세워진 야스쿠니 신사의 원래 명칭은 쇼콘샤(招魂社)였다. 메이지 유신 이후 바쿠후(幕府) 존폐를 놓고 다퉜던 보신(戊辰)전쟁에서 유명을 달리한 관군을 위령하기 위해 건립해 메이지 일왕이 1879년 야스쿠니로 개명, 오늘에 이르렀다. 일본은 일왕이나 국가를 위한 전쟁에 참여, 사망한 병사의 혼령을 야스쿠니에 안치하고 이들을 신으로 격상한다는 조건을 내걸어 병사들을 죽음의 전쟁으로 내몰았다. 현재 이 곳에 명부를 올린 이름은 246만명을 넘는다.
이런 배경에서 탄생한 야스쿠니 신사에는 일본의 침략전쟁에 대한 통렬한 사죄나 반성을 찾아볼 수는 없다. 오히려 과거 전쟁을 정당화하는 궤변들이 가득하다. 야스쿠니의 가치관을 고스란히 드러낸 곳이 경내에 위치한 전쟁박물관 유슈칸(遊就館)이다. 야스쿠니의 부속시설로 패전 이후 미군정에 의해 강제 폐쇄됐다가 1986년 재개장한 이 곳에는 막부말기부터 제2차 세계대전까지 일왕과 국가를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스러진 일본군의 각종 유품 10만점을 전시하고 있다.
침략전쟁 미화하는 유슈칸
1층 입구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곳에 태평양전쟁 말기 가미카제(자살특공대)들이 폭탄을 실은 채 적함에 충돌한 제로센 전투기가 버젓이 전시돼있다. 가미카제 대원들이 "죽어서 야스쿠니에서 만나자"라는 말을 남겼던 일화는 유명하다. 광기의 전쟁의 산물을 단순한 기념품처럼 전시해놓은 발상에서 유슈칸이 얼마나 죽음을 가볍게 여기는지 상상할 수 있다.
유슈칸은 일본이 대외적으로 행한 모든 전쟁을 정당화하고 있다. 중일전쟁을 지나사변, 태평양전쟁은 대동아전쟁 등 일본이 전시때 사용하던 명칭 그대로 쓰고 있다. 영상자료실에 상영되는 홍보영화에는 일본이 만주를 침략, 중일전쟁을 일으킨 원인을 중국의 과격한 배일운동과 테러, 부당한 공격 때문으로 소개하고 있다. 태평양전쟁 당시 지도에는 한반도와 대만을 합병이 아닌 성립으로 표현, 강제로 나라를 빼앗은 것이 아니라 한국과 대만인 스스로가 일본과 하나가 되고 싶어했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 일본의 정치인이 야스쿠니를 참배하는 것을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참배 대안 지도리가후치 묘원
야스쿠니 신사측은 왕을 위해 목숨을 바친 병사들을 추모하는 시설이라고 주장하지만 정작 일왕은 야스쿠니를 방문하지 않고 있다. 정확하게 말하면 방문하지 못하고 있다. 일왕이 야스쿠니 신사를 찾지 않게 된 것은 1978년 태평양전쟁 A급 전범이 합사된 사실이 드러난 뒤부터다. 일왕은 정치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원칙에 따라 외교적 문제를 일으키지 않기 위한 배려 차원에서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중단했다.
1989년 즉위한 아키히토(明仁) 일왕은 매년 야스쿠니 신사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위치한 지도리가후치(千鳥ヶ淵) 전몰자묘원에서 추도를 올리고 있다. 1959년 건립된 이 시설은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 국외에서 사망한 사람 중 신원을 모르거나 인수자가 없는 전몰자 35만여명의 유골을 모시고 있다.
일왕뿐 아니라 하토야마 유키오 전 총리 등 역대 민주당 정권 총리들이 모두 야스쿠니를 대체하는 참배시설로 이 곳을 이용했다. 지난 해 10월 존 케리 미국 국무장관과 척 헤이글 국방장관도 지도리가후치를 방문, 일본 정치인에게 "지도리가후치야 말로 정치적 의도가 없는 순수한 참배 시설"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지도리가후치가 일본의 공식적인 참배시설로 인정받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다는 지적도 있다. 규모도 1만6,000㎡가량으로, 8만여개 일본 신사중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야스쿠니 신사(9만3,00여㎡)에 비하면 초라하다. 무명용사의 추모시설인 만큼 모든 유가족을 아우르는 묘원 역할은 미흡하다는 목소리도 있다. 이런 가운데 일본 정부내에서 새로운 대체 추모시설을 건립하자는 논의도 나오고 있지만 보수성향의 여당인 자민당의 반대가 거세 쉽사리 논의가 되지 않고 있다.
'아베 야스쿠니 참배 위헌소송'도쿄 사무국의 즈시 미노루는 "일본 정치인의 과거사에 대한 통렬한 반성이 전제되지 않는 한 어떠한 대안시설도 순수함을 담을 수 없다"며 "정치인의 올바른 역사관 정립이 먼저"라고 강조했다.
도쿄=한창만특파원 cmha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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