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왜 상해치사인가범행 동기·흉기 유무사망 가능성 등 종합 판단맨손으로 때려 숨지면대부분 살인죄 해당 안 돼● 고의성 입증 어려웠나칠곡 지속적 학대 정황초동수사 부실 비판론도● 형법체계 수술 필요성은"자기방어 능력 취약한아동 피해 땐 적용 달라야"
"여덟 살짜리 의붓딸을 때려 숨지게 한 계모를 살인죄로 사형시켜야 한다." 지난해 10월 학교 소풍날에 울산의 이모양이 2,300원을 훔치고 거짓말을 했다는 이유로 계모 박모(41)씨에게 맞아 갈비뼈 16대가 부러져 숨진 사건이 알려지자 여론은 분노로 들끓었다. 학대사망 사건에 통상 상해치사 혐의를 적용해온 검찰은 검찰시민위원회의 자문을 거쳐 박씨를 살인 혐의로 기소했고, 법정최고형인 사형을 구형했다.
그러나 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울산지법은 11일 "박씨에게 아이를 살해하려는 확정적 또는 미필적 고의가 있었음이 합리적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증명됐다고 보기 어렵다"며 상해치사죄를 적용해 징역 15년을 선고했다.
경북 칠곡 사건의 경우 숨진 딸의 언니 김모(12)양이 계모 임모(36)씨의 강요로 줄곧 "내가 동생을 죽였다"고 주장했고, 임씨는 한 대만 때렸다고 진술해 애당초 상해치사 혐의로 기소됐다. 김양이 지난달 법정에서 계모의 범행임을 털어놓은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살인죄를 적용하라는 여론이 비등했지만, 검찰은 임씨의 구속시한이 임박한 점 등을 들어 공소장 변경을 하지 않았고 법원은 이날 구형량의 절반인 징역 10년을 선고했다.
일반 국민의 법감정으로는 납득하기 어려운 판결이지만, 현행 형법과 오랜 기간 확립돼온 판례상 살인죄 적용은 어렵다는 것이 법조계의 대체적인 분석이다.
형법과 판례상 살인죄를 적용하려면 '살인의 의도'와 '행위의 고위성', '흉기 사용 및 급소 공격' 등 크게 세 가지 요건을 충족해야 한다. 울산 사건 재판부도 "살인의 범의(犯意)가 있었는지 여부는 범행 경위 및 동기, 사용된 흉기의 유무ㆍ종류ㆍ용법, 공격 부위와 반복성, 사망의 결과 발생 가능성 정도 등 객관적 사정을 종합 판단해야 한다"며 살인죄를 적용할 수 없는 이유를 조목조목 설명했다. ▦범행 장소가 집이어서 박씨가 마음먹기에 따라 흉기를 사용할 수 있었지만 손과 발로만 구타했으며 ▦폭행 당시 출혈이나 호흡곤란 등 증상이 없어 아이가 숨질 수 있다는 인식을 하고도 계속 때렸다고 단정할 수 없고 ▦아이가 의식을 잃자 당황해 119에 신고하고 안내에 따라 심폐소생술을 실시한 점 등으로 미뤄 '살인의 고의성'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른 법원 관계자도 "보통 흉기가 아닌 맨손으로 때렸을 경우 살인죄를 인정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고 설명했다.
반면 자기방어 능력이 취약한 데다 오랫동안 학대를 받아온 아동에 대한 끔찍한 범행에 일반적인 폭행사망 사건과 똑같이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특히 외국에서는 유사 사례에 살인죄가 적용된 판례가 적지 않다. 해외 판례를 수집해 분석한 울산지검에 따르면 지난해 영국에서는 의붓아들(당시 4세)에게 수개월간 폭력을 휘두르다 머리를 때려 숨지게 한 계부에게 살인죄를 적용해 무기징역(최소 구금기간 30년)이 선고됐고, 의붓딸(3세)를 때려 뇌손상으로 숨지게 한 독일의 계부도 살인죄가 인정돼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 영국과 독일은 사형제가 없어 무기징역이 법정 최고형이다.
검찰이 살인 혐의를 주장하면서도 혐의를 뒷받침할 만한 객관적이고 충분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다는 비판도 제기됐다. 칠곡 사건 역시 초동 수사 때부터 언니 김양을 장기간 학대한 부모에게서 격리시키고 아동심리분석 전문가를 참여시켜 조사했다면 '언니가 동생을 죽였다'는 어처구니없는 수사 결과가 나오지도 않았고, 계모의 범행의 고의성을 입증할 충분한 증거 수집이 가능했을 것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이명숙 한국여성변호사회 회장은 "내심의 영역인 살인 의도까지 밝히긴 어려웠더라도 김양이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안정적 심리상태에서 계모의 강요 등을 진술했다면 최소한 '사망에 이르러도 상관없다'는 정도(미필적 고의)로 임씨의 살인 고의성을 입증할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검찰 출신의 한 변호사는 "경찰 수사결과를 큰 고민 없이 넘겨 받은 뒤 아동학대 사건의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고 기계적으로 형법을 적용한 검찰의 안이함이 빚어낸 비극"이라고 평했다. 노영희 변호사도 "검찰이 재판 중이라도 아동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자백을 번복한) 김양의 진술 신빙성만 확보했다면 공소장 변경이 가능했을 텐데 재판 막바지까지 이러한 고민을 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한 형사법관은 "항소심에서 살인죄를 주의적 공소사실로, 상해치사죄를 예비적 공소사실로 변경해 최근 밝혀진 내용을 적극적으로 소명하면 1심보다는 薦?형량이 선고될 수 있다"며 검찰의 적극적인 대응을 주문했다.
울산=목상균기자 sgmok@hk.co.kr
정재호기자 next88@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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