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여러분! 드디어 우리는 금융실명제를 실시합니다. …금융실명제가 실시되지 않고는 이 땅의 부정부패를 원천적으로 봉쇄할 수가 없습니다." 1993년 8월12일 김영삼 대통령의 특별 담화문이 전격 발표됐다. 남의 이름이나, 가공의 인물로도 할 수 있던 예금 등 금융거래를 금지하는 금융실명제를 도입한다는 내용이었다. 그 과정은 '깜짝 쇼' 그 자체였다. 부총리 이경식ㆍ재무장관 홍재형 라인을 가동, 철통보안 속에 극비작업을 진행했고, 국회 법안심의에서의 논란을 피하기 위해 대통령 긴급명령 형식을 빌었다.
■ 파장은 컸다. 1982년 전두환 정권 당시 이철희ㆍ장영자 비리 스캔들에 따른 민심 수습책으로 처음 거론된 이후 우여곡절 끝에 11년 만에 실행에 옮겨진 금융실명제는 경제뿐 아니라 정치ㆍ사회적으로 큰 변화를 몰고 왔다. 누가 어떤 금융자산을 얼마나 보유하고 있는지 컴퓨터로 즉각 파악이 가능해 거래 관행에 일대 변화가 일었다.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의 수 천억원대 비자금의 실체가 드러난 배경에도 금융실명제가 있었다.
■ 하지만 법에 구멍이 있음도 분명해졌다. 비(非)실명 계좌, 이른바 허명(虛名)이나 가명(假名)만을 규제한 탓에 실명의 일종인 차명(借名)은 공백으로 남겨뒀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당사자끼리의 '합의 차명'은 막을 수 없었다. 탈세와 비자금 조성, 불법 증여 등 재벌총수 비리나, 정치인 관련 금융 범죄가 불거질 때마다 차명 계좌는 단골로 등장했다.
■ 여야가 이르면 이달 안에 '불법 목적'의 차명거래를 강력히 규제하는 금융실명제법 개정안을 통과시킬 예정이라고 한다. 법을 어기면 실소유주와 계좌 명의자, 관련 금융기관 관계자 모두 5년 이하 징역 또는 5,000만원 이하 벌금 등 처벌을 받게 된다. 다만 동창회ㆍ종친회 통장 등 '선의'의 차명계좌는 허용된다. 또 계좌에 있는 돈은 명의자 소유로 추정한다는 규정도 포함된다고 한다. 차명계좌는 부부와 자녀, 친구, 동업자 등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의 다양한 인간관계 속에 여러 형태로 존재한다. 법안 통과 과정에서 선의의 피해자가 없는지 정밀하게 다듬어야 할 것이다.
박진용 논설위원 hub@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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