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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나리 개화시기

입력
2014.04.11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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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되면 해마다 놓치지 않고 살피는 신문의 구석이 하나 있다. 봄꽃의 개화시기를 알려주는 작은 공간이다. 봄꽃의 개화시기를 알려주는 신문의 이 '전통'을 나는 꽤 살갑게 생각한다. 근대사를 관통해보면 식민지 치하에서 우리말의 신문이 발행될 때부터 봄꽃의 기상을 알려주는 이 기사는 민중들에게 꽤 시사하는 바가 컸을 것이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고 시인이 성대를 우렁차게 높이지 않아도 누구에게나 봄은 대단한 은유니까.

신문마다 개화를 알려주는 꽃의 종류도 다르고 개화시기도 조금씩 다르지만, 가만히 신문지를 펼쳐놓고 있으면 입가에도 꽃길이 열리듯 미소가 번진다. 개화시기는 보통 꽃의 표본나무를 기준으로 봉우리의 80% 정도가 열리면 이를 측정하여 알려주는 것이 상례다. 대부분의 신문이 자신들이 신뢰할만한 기상대의 정보를 바탕으로 평년 차를 계산해 시기 차를 보여준다. 비교와 경쟁의 프레임, 수치와 통계로 일상과 삶의 구석구석들이 대변되는 시대이지만 이 개화시기 정보만큼은 마음을 불편하지도 않고 그윽한 맛이 있다. 서귀포부터 여수, 서울, 통영, 전주, 대구까지 전국 곳곳에서 차이를 다투지 않고 피어나는 꽃들의 '봉우리 열림'은 잠시나마 내겐 진보도 보수도 아닌 문명의 의미로 다가온다. 꽃들은 서로를 보며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 어이 우리 처음 본 사이 아니지?" 꽃구경을 계획하는 사람들에겐 벚꽃이니 진달래니 매화니 개나리의 만개 정보가 말초적이거나 흉문에 가까운 기사들이 넘치는 세상의 어떤 기사정보보다 신뢰하고 싶은 것일 것이다.

봄철마다 세계의 신문들을 모두 뒤적거려 보았다고 할 순 없으니 장담할만한 일은 아니지만, 여행을 자주 다니는 탓에 추운 겨울에 떠나 봄철까지 외국에 있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아직까지 외국신문에서 우리나라처럼 개화시기를 빠지지 않고 측량해주는 기사는 본 적이 없다. 100년이 넘도록 대한민국 신문들이 이 개화시기만큼은 성향과 상관없이 꽃 소식을 편집 속에서 빠뜨리지 않고 전해온 지구력에 감사드리고 싶다. 몇 년 전부터 나는 신문의 기사들을 볼 때마다 구질구질한 소식으로 인해 마음의 기상이 악천후가 되어버려서 소통이나 신뢰보다는 쉽게 피로해지는 쪽이었다. 나 혼자만이 겪는 세계와의 불화는 아니려니 하고 태도를 다그치지는 않고 산다. 하지만 사실 현대사회에서 우리가 나누는 정보의 교환성이라는 구조를 들여다보면 사실이냐? 거짓이냐? 보다 그것이 얼마나 실감이 나느냐에 우리 시대의 리얼리티가 집중되어 있고, 그 고독한 판타지를 생각해본다면 매체가 꽃소식을 자신들이 원하는 상징으로 보여주고 싶어하는 의중만 잘 전달시키고 몇몇이 마음만 먹으면 '꽃 개화시기'정도를 뒤바꾸고 날치기하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닐 것이다. 물론 그건 미개인들이나 생각해 봄 직한 발상일 것이고 아직까지 그런 변은 꽃들이 당하지 않는 추세다. "그래도 신문 속에 아직 '개나리 개화시기'가 남아 있어 봄날은 다행이야" 라고 말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개화는 인간의 지혜가 열리고 새로운 사상이나 풍속이 발달한다는 말로 '개명(改名)'과도 비슷한 뜻으로 쓰인다. 개화사상가들은 인간계가 미개. 반 개화. 문명개화의 세 단계로 점점 발전한다고 보았다. 이것이 좀 더 높은 문명화의 단계로 가는 진보라는 말로 사용되어 왔다고 믿는다. 그런 점에서 지나친 정보의 홍수와 감염 속에서 문명개화(文明開化)를 조금 미루고 봄날 꽃 소식에 잠시나마 자신의 머릿속을 차지하는 서리를 잊고 어떤 지식이나 정보보다도 봄날의 꽃 내음에 자신의 살 냄새가 있다는 느낌을 받고 있다면 "나는 미개(未開)하지 않다"고 중얼거리고 싶어진다. 1881년 신사유람단들 중 한 사람은 돌아와 이렇게 보고 한다. "사는 동안 이름 없는 꽃을 하나 발견하고, 그 꽃 이름을 손수 지어주고 봄이면 그 이름을 가만히 입 밖으로 꺼내보고 꽃 냄새를 기억하며 사는 일이 개명을 하는 일이다." 세상의 소식에 조금 외로워도 나는 혼자서 '개나리개화시기 협동조합'대표로 일하며 시를 쓰겠다.

김경주 시인ㆍ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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