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사면 표지 안쪽에 짧은 메모를 남기곤 했다. 이 책을 처음 펼쳤던 2010년 1월 24일에도 그랬나 보다. 딱 4년 젊었던 그때의 나는 '떠남의 설렘으로 하루하루를 살고 싶다'는 말로 이 책의 첫인상을 표지에 적었다. 아마도 그날의 내 심장은 지금보다 더 뜨거운 설렘을 원했고, 영혼은 더 멀리 떠남을 갈망했으리라. 그러나 두 번의 대지진이 지구를 부수고, 한 번의 대선이 치러지는 동안 나는 제대로 설레지도, 떠나지도 않았다. 중년의 문턱에 주저앉아, 저 격납고 안의 거대한 비행기를 그저 기웃거리며 감히 꿈을 싣지 못했다. 보딩의 수많은 기회를 날려보내고, 남의 영토로 날아가 버린 비행기들의 꼬리 날개를 안타까워하며 이륙의 시간을 스스로 연기했던 어리석음. 프랑스의 작가 알랭 드 보통이 2009년 여름 영국 히드로 공항에서 사상 유례없는 '공항 상주 작가'로 일주일을 보낸 기록으로 묶인 이 책은 '지옥의 한 철' 같은 삶을 사느라 나름의 비상을 유예했던 현대인의 가슴엔 한 줄기 시원한 바람이다.
"여행은 생각의 산파"라는 말을 남겨 틈만 나면 짐을 싸는 여행자들의 방랑벽에 그럴싸한 핑계를 만들어줬던 (2004년)에 이어 보통이 펴낸 두 번째 여행 에세이인 은 공항이 갖는 시ㆍ공간적 중의를 때론 문학적으로, 때론 가전제품 설명서처럼 건조하면서 이성적으로 풀어내는 취재수첩이기도 하다. "나는 내 비행기가 늦어지기를 갈망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래야 어쩔 수 없는 척하며 조금이라도 더 공항에서 뭉그적거릴 수 있으니까"라고 시작하는 책의 첫 문단은 보통이 공항이란 공간에 얼마나 강한 애착을 갖고 있는지 짐작하게 한다. 그는 단지 여행의 시작과 마지막의 의미만으로 공항에 접근하는 여타 에세이들과 달리 활주로, 입국장, 세관검사장, 그리고 주차장 등 공항의 모든 공간이 지닌 여행과 관련된 심상을 문학에 빗대어 두루 이야기한다.
보통은 히드로 공항의 실 소유주인 브리티시 에어(BA)측으로부터 하루 1,500여 대의 항공기가 쉴 새 없이 뜨고 내리는 공항의 모든 구역을 마음대로 취재하고 그곳에서 만나는 사람, 공간과 물건들에 대해 문학적인 사유를 펼쳐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이에 히드로 공항 제5 터미널 출국장 D와 E구역 사이에 책상을 가져다 놓은 작가는 체크인 상황 안내판에서 "닥쳐오는 순간마다 매달리는 모든 약속들"을 끄집어낸다. 보통은 이 안내판을 "공항의 매력이 가장 집중된 곳"이라 부르며 "몇 시간 안에 전혀 모르는 언어를 사용하는 나라로 떠나는 일이 얼마나 쉬운지 보여준다"고 묘사한다. 출발하지 않은 비행기가 눈앞에 멀쩡히 보이지만 순전히 사무적인 이유로 지각한 승객을 향해 절대 문을 열지 않는 모습에서 작가는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가 네로 황제를 위해 쓴 '분노에 관하여'라는 논문 가운데 "분노의 뿌리는 희망이다"는 명제를 떠올린다. 일상의 탈출을 약속했던 스케줄이 더는 실현될 수 없어 화를 터트리는 여행자는 공항에 주기되어 있는 희망이란 이름의 정체를 또렷하게 해준다.
공항들은 사람의 얼굴이 모두 다르듯, 서로 다른 이미지를 풍긴다. 저 멀리서 승객들을 향해 빈 총을 겨눈 경비대가 투박했던 레오나르도 다 빈치 공항, 편의시설이 차고 넘쳐 마치 중국 야시장을 헤매는 듯한 창이 공항, 초대받지 않은 손님을 걸러내기 위해 하루 종일 고래고래 소리치는 케네디 공항 등이 그랬다. 보통이 그려낸 히드로 공항의 심상은 총천연색이면서 흑백이다. 전세계에서 가장 큰 공항으로 부산함이 화려하지만, 이별하고 돌아선 남녀의 등처럼 순식간에 싸늘해지기도 한다.
공교롭게도 나는 지금 보통이 "우리가 정말로 이 행성에 혼자라는 사실이 분명해지는 공간"이라 표현한 히드로 공항의 출국장에 서있다. 굳이 부치는 짐 속에 넣지 않고 이 책을 손에 쥔 채 '무한한 여행의 가능성을 내포한' 전광판을 바라본다. 윤회의 고리처럼, 거대한 공항은 쉴 새 없이 도착하는 여행객과 출발하는 여행객을 뱉어낸다. 한 발만 뻗으면 일상으로 빨려 들어가버릴 것 같다. 나는 "다시 집을 떠날 핑계가 절대 생기지 않을 것 같아 걱정"이라는 보통의 말에 심하게 동감한다.
런던=양홍주기자 yangho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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