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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에 매진하며 500년 역사를 이끈 조선의 가문, 그 두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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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에 매진하며 500년 역사를 이끈 조선의 가문, 그 두번째

입력
2014.04.11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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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양반은 지식인을 자처했다. 유교 경전과 역사서가 그들 인격의 밑바탕을 만들어 냈고 삶의 가치를 규정해줬으며 그들은 이런 공부를 현실에서 구현하고자 벼슬길에 나섰다. 과거에 합격한 뒤 벼슬을 물리치는 이도 많았는데 재야에 남아 은일자나 처사로 한평생을 연구와 저술에 몰입했던 이들이다.

이 책은 뿌리회가 펴내는 '조선의 양반 문화' 시리즈의 두 번째 책이다. 2004년 5월 시작된 뿌리회는 매년 네 차례 조선의 명문가를 찾아 그들이 이어온 역사의 맥을 짚는 작업을 해왔다. 이번 책에서는 한양 조씨 정암 가문, 창녕 성씨 청송 가문, 창녕 조씨 남명 가문, 영일 정씨 송강 가문, 풍산 류씨 겸암∙서애 가문, 무안 박씨 무의공 가문, 해주 오씨 추탄 가문, 파평 윤씨 명재 가문, 한양 조씨 주실 가문, 여주 이씨 퇴로 가문 등 모두 열 가문을 다뤘다. 이들은 결코 관료를 많이 배출하고 권력의 정점을 누린 가문이 아니다. 이 책이 조선 명가의 기준으로 삼는 것은 유교의 예와 덕이다.

창녕 성씨는 조선조의 대표적인 명문 집안이다. 성삼문, 성담수, 성현, 성수침, 성혼 등 이름을 떨친 수많은 학자와 관료가 이 집안에서 배출됐다. 그 중 성수침의 서재에는 특히 책이 가득했다. 평소 "가장 고귀한 것은 힘써 배워 그 지식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라고 말한 그는 1519년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백악산 아래 집을 짓고 태극도와 정주서를 필사하며 여생을 보냈다. 그의 아들 성혼은 이이와 함께 도학종사로 16세기 기호학계를 대표한 인물이다. 이들 부자에 대한 조선 학자들의 존경과 칭송은 묘소를 둘러보면 잘 알 수 있다. 성수침의 묘갈명은 이황이 직접 썼으며 성혼 묘비의 비문은 김집이 짓고 윤순거가 썼다.

명가의 탄생은 결과적으로 조선시대 예학의 발달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이들 가문에서 벼슬길에 대한 열망, 탄탄한 경제력, 학맥과 혼맥의 단단한 결속이 여전히 중요한 요소이긴 했으나 그 중심에는 늘 권력과 힘보다는 도와 예의 정신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황수현기자 so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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