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중랑천에는 하천을 가로지르는 돌다리가 놓여 있다. 이름은 살곶이다리(전곶교). 화살이 꽂힌 땅이라는 뜻이다. 사연은 약 6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함흥에 갔다 한양으로 돌아오던 태조 이성계가 마중 나온 태종 이방원에게 활을 쏘았다. 아버지의 화살은 아들의 몸을 피해 땅으로 떨어졌다. 그 자리가 바로 살곶이라는 것이다.
화살이 정말 이방원을 향했을지 지금 와서 확인할 길은 없다. 다만 을 보면 자왕(子王)을 죽이고 싶어했을지 모를 부왕(父王)의 심정이 세간에도 오르내렸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성계 하면 무인으로 승승장구해 조선 개국까지 일궈낸 영웅, 이방원하면 부왕을 몰아내고 공신, 형제, 처남들까지 숙청한 피도 눈물도 없는 인물로 대부분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늘 그렇듯 역사는, 또 부모자식 관계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부자의 운명을 갈라놓은 장본인은 잘 알려져 있듯 정도전이다. 과거에 급제해 문신을 꿈꿨을 이방원의 삶이 이성계가 정도전을 만난 이후 송두리째 바뀌었다. 세자 책봉에서 밀린 뒤 생명의 은인이기도 한 정도전을 제거하고 부왕에게 칼을 겨누며 군주가 됐다.
책은 부자가 리더십의 두 유형을 보여준다고 분석한다. '목표를 세우면 앞장서서 온갖 비난을 감수하며 행동에 옮기는' 유형과 '목표는 세웠지만 비난은 감수하지 않으려는' 유형이다. 전자가 이방원, 후자가 이성계다. 이성계는 조선의 명운을 가를 세자 책봉에 공(조정의 간언)과 사(부인의 불평)를 명확히 따지지 못했고, 남은 고려 왕족의 행보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등 세평에 필요 이상으로 신경 썼다고 책은 평한다. 반면 이방원은 조선을 법이 지배하는 나라로 만들고자 숙청을 감행했고, 사대부들의 반발을 무릅쓰고 신분제를 완화했으며, 아들(세종)을 위해 왕권을 위협하는 요소들을 가차없이 제거했다는 것이다.
역사를 읽는 재미 중 으뜸은 만약이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상상해보는 것이다. 만약 이성계가 이방원을 후계자로 택했다면, 이방원과 정도전이 같은 배를 탔다면, 부자가 끝내 화해를 했다면, 역사는 달리 쓰였을 터다. 역사 이야기꾼의 보따리는 역시 흥미진진했다. '이미지의 정치가 난무하는 지금, 누가 수많은 비난을 무릅쓰면서 악역의 길을 묵묵히 걷는 것으로 구민(丘民)들에게 천명의 소재를 확인받을 것인지' 묻는 서문의 말미가 묵직하다.
임소형기자 precar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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