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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바둑계 뒤흔든 '낭랑 18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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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바둑계 뒤흔든 '낭랑 18세'

입력
2014.04.11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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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바둑계가 바야흐로 1996년생 쥐띠 전성시대다.

랭킹 1위 최정(18)이 여류명인전을 3연패하고 여류기성까지 2관왕을 지키고 있는 가운데 최근 동갑내기 김채영(18)이 제19기 가그린배 여류국수전 결승 3번기 최종국에서 박지은에 극적인 행운의 역전승을 거두고 타이틀을 획득했다. 국내 여자기전 3개를 18세 쥐띠 동갑 두 명이 석권한 것이다.

2011년 말 루이나이웨이가 귀국한 후 박지은, 조혜연, 김혜민 등 선배기사들과 최정, 박지연, 김채영 등 후배기사 간에 치열하게 전개됐던 신구세대의 주도권 다툼이 10대 신예들의 승리로 마무리된 셈이다.

'입신'과 '수졸'의 대결로 관심을 모았던 이번 여류국수전 결승 3번기의 진행 과정은 마치 누군가 미리 각본을 짜놓은 듯 그야말로 드라마틱했다. 관록의 박지은이 첫 판을 가볍게 이겼지만 패기의 김채영이 2국을 승리해 승부를 원점으로 돌린 다음, 3국에서 다시 극적인 행운의 역전승을 거두며 생애 첫 우승을 차지했다.

박지은의 흑번으로 시작된 결승 3국은 초반부터 줄곧 흑이 앞서 중반 무렵에는 이미 흑 필승의 형세였다. 드디어 잔 끝내기까지 거의 마무리되고 종국 시간이 가까워졌다. 반면에는 반패 세 개만 남은 상황, 패를 하나씩 차례로 이으면 끝으로 박지은의 승리가 확실했다. 다음날 황룡사배 2라운드 경기에 출전하는 박지은이 가벼운 마음으로 중국행 비행기에 오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뜻밖의 돌발 사태가 발생했다. 하변에서 두 선수가 한참 동안 패싸움을 벌이다 김채영이 △로 패를 따내자 패감이 부족한 박지은이 1로 한 집을 만들었고 김채영이 2로 흑 석 점을 따냈다. 그러자 박지은이 3으로 우상귀 반패를 이었다. 한데 이곳은 흑이 이을 수 없는 곳이다. 잇는 순간 자충이 돼서 흑돌 전체가 단수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흑은 먼저 A로 가일수한 다음 반패를 메우는 게 올바른 끝내기 수순이다.

사실 우상귀는 자칫 착각할 수도 있는 형태여서 조금 전에 김성룡 9단이 이 부근을 가리키며 "혹시나 흑이 덜컥 저기를 이어서 대형사고가 터지는 거 아니냐"고 농담을 했는데 말이 씨가 된다고 정말 박지은이 그곳을 이은 것이다. 순간 관전자들은 일제히 "아니, 저게 뭐야. 기보 입력이 잘못된 거 아냐?"라고 소리 쳤고 일부는 박지은이 정말 그곳에 뒀는지 확인하기 위해 서둘러 4층 대국실로 뛰어 올라갔다.

이미 바둑은 끝나 있었다. 한 마디로 상전벽해, 순식간에 우상귀가 몽땅 백집으로 변했고 김채영은 얼굴이 빨갛게 상기된 채 마치 죄인처럼 고개를 아래로 떨구고 있었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기록자의 말로는 박지은이 자기가 엄청난 자충수를 두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것 같다. 반면 김채영은 바로 상대의 실수를 알았지만 너무나 엄청난 일이라 무척 당황스러웠다. 물론 이런 경우 승부는 승부이므로 당연히 상대방 돌을 따내야 한다. 하지만 생애 첫 타이틀이 걸린 엄청나게 큰 승부에서 난생 처음 겪는 돌발사태이기에 잠시 어쩔 줄 몰랐다. 김채영은 당시 손이 덜덜 떨리고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고 했다. 능히 짐작이 가는 상황이다.

결국 계시원이 마지막 10초를 남기고 "하나 둘 셋…" 하고 초를 읽기 시작하자 김채영이 4로 둬서 흑돌 18개를 따냈고 박지은이 "엇"하고 신음을 내질렀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 어이없는 대역전 해프닝에 한국은 물론 중국에서도 "기보가 맞느냐"며 문의 전화가 왔다.

잠시 후 마음을 추스린 박지은이 침통한 표정으로 아무 말도 없이 빠르게 바둑알을 거둬 바둑통에 담은 후 황급히 자리를 떴다. 곧 이어 김채영도 화장실로 향했는데 돌아올 때 보니 눈자위가 발갛게 젖어 있었다. 생애 첫 타이틀 획득이 기쁘기도 하고, 한편 선배 언니에게 무척 미안하기도 하고, 만감이 교차했던 모양이다.

이렇게 해서 새로운 여류국수가 탄생했다. 세상에 우연과 필연은 어쩌면 종이 한 장 차이일 지도 모른다. 역사의 한 페이지가 또 이렇게 넘어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박지은은 그동안 부동의 랭킹 1위를 지키며 세계대회서 맹활약을 했지만 이상하게도 국내대회서는 거의 우승을 하지 못했다. 여류국수전에서 2008년 13기 때 딱 한 번 우승했고 여류명인전서도 2000년 1회 우승이 끝이다. 2011년 궁륭산병성배 우승 이후 국내외 기전에서 한 차례도 정상에 오르지 못했다.

한편 김채영은 단숨에 국내 여자바둑계 신데렐라가 됐다. 2011년 입단한 김채영은 지난해 2월 황룡사배서 4연승을 거둬 한국의 우승에 크게 기여했고, 4월에는 화정차업배에도 한국 대표로 출전해 우승을 차지했다. 또 7월에는 인천 실내무도아시안게임 여자바둑단체전에서 은메달을 따냈다. 국가대표팀에 편입돼 훈련을 받은 게 큰 효과를 봤다고 한다. 올해부터는 박지은, 이민진, 오유진과 함께 중국 여자리그 을조에 용병으로 출전한다. 김성래 5단의 장녀로 권갑용-권효진에 이어 국내 두 번째 부녀기사다.

박영철 객원기자 indr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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