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봄, 아니 놀라운 봄이다. 평소 같으면 4월이 되어야 피던 목련은 물론, 목련이 진 다음에 오던 벚꽃마저, 4월이 되기 한참 전이건만 개나리와 경쟁하듯 활짝 피더니, 어느새 다들 져버렸다. 5월이 돼야 피던 라일락도 이미 활짝 피었고, 개나리는 아직도 그 화사한 노란빛으로 버티고 있다. 시간이 응축된 걸까? 그보단 계절이 비틀려 버린 게 아닐까 싶다. 다른 시간대에 피는 꽃들이, 이렇게 선후마저 바뀌며 피고 지는 것을 보면, 각각의 꽃들을 관통하는 시간들이 뒤엉키고 꼬여버린 것 같아서 말이다.
하지만 계절 이상으로 비틀려 버린 건 우리가 사는 이 사회의 시간이고, 서로 섞이지 못한 채 다른 속도로 꼬여버린 건 거기 사는 사람들의 시간이다. 생활고를 견디지 못해 송파에서 자살한 3모녀의 이야기를 들은 게 얼마 되지 않았는데, 이번엔 인천에서 부자가 역시 생활고를 이기지 못한 채 자살했다고 한다. 송파의 모녀들은 기초생활수급제도를 알았다면 괜찮았을 거라고들 얘기했지만, 이번엔 기초생활수급금을 받던 분들이 자살한 것이니 뭐라 말할라나 모르겠다. 분명한 건, 고독하고 쓸쓸한 자살의 소식이 잊혀질만하면 다시 이어지는 자살의 릴레이가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자살자들을 관통하는 하나의 시간대가 만들어진 것일까? 먹을 게 넘쳐나서 비만과 다이어트가 관심사가 된 시대, 이전 어느 시대와도 비교할 수 없는 고도의 생산성을 자랑하는 시대에, 상품들이, 바로 옆에 있는 곳에도 가지 못한 채, 넘치는 곳에서 넘치는 곳으로만 흐르고 있음이 분명하다. 과잉된 상품이나 생산물을 잇는 시간이, 결핍으로 죽어가는 이들을 잇는 시간과 나란히, 그러나 섞이지 않으며 흐르고 있는 것이다.
정규직 노동자의 시간과 비정규직 노동자의 시간도 그럴 것이다. 안정된 삶을 허용하는 안정되고 연속적인 노동시간이 한 편에 있고, 몸이 아파도 쉴 수 없는 불안정하고 단속적인 노동시간이 다른 한 편에 있다. 바로 옆에서, 동일한 작업을 하는 사람들인데도 말이다. 활동보조인이 없어서 화재로 불타 죽은 동료 장애인의 장례식 노제를 하다가 도로교통법 위반이라며 부과된 벌금을, 돈이 없어 몸으로 때우겠다며 휠체어를 타고 교도소에 들어가 일당 5만 원짜리 노역을 자청했던 장애인이 있고, 떼먹은 수백억의 세금 등 때문에 내야 할 벌금을 몸으로 때우러 들어가 자신의 노역이 일당 5억 원으로 계산되는 시간 속에 있음을 흐뭇하게 확인할 수 있었던 회장님이 있다. 그리고 그들에게 하루의 시간을 만 배의 두께로 다르게 계산해준 법관들이 있다. 그 법관들 역시 그렇게 판결하면서, 자신 또한 그 5억 원짜리 시간으로 그와 함께 묶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웃었을 것이다.
이 상이한 시간들을, 단지 시계 바늘이 가리키는 어떤 시점에 옆에 나란히 있다는 사실만으로 하나의 '시대'로 묶을 수 있을까? 모든 시대가 어차피 그런 거라고 말할 수 있을까? 갓난애를 가진 눈먼 봉사가 굶어 죽지도 않았고 자살이란 꿈에도 생각지 못하던 시대란 그저 오래된 소설 속의 허구였을 뿐일까? 우리는 이렇게 하나의 시대마저 되지 못하는, 섞일 수 없는 이질적 시간이 새끼줄처럼 꼬여 있는 시간들을, 꼬인 시간에 따라 비틀려 흐르는 각이 한 시간들을 살고 있을 뿐이다. 바로 옆에 있지만 넘어갈 수 없어서 더욱 힘들게 하는 두꺼운 시간들에 짓눌려 산다.
다른 시기에 피는 꽃들이 한꺼번에 핀다면, 그 계절은 최소한 반은 '미친' 것이다. 미쳐가는 기후 때문일 게다. 너무도 다른 삶이, 배제의 선으로 분리된 채 한꺼번에 병존한다면, 그 시절 역시 반은 '미친'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모든 명예가 비비 꼬인 시간들로 비틀려 있기 때문이고, '정의'라는 말조차 그저 각각 따로따로 흘러가는 시간들로 찢겨져 있기 때문이다. '양극화'나 '격차' 혹은 '가난' 못지않게 슬프고 힘든 건 '인간'의 명예도, 함께 사는 이들 사이의 정의도 비틀리고 찢겨져 버린 이런 시절을 눈뜨고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일 것이다.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기초교육학부 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