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연약한 것들이 세상의 풍경을 바꾸어놓는 4월이다. 아스팔트 도로와 담벼락 틈으로도 민들레와 제비꽃은 피어나고, 겨울을 견딘 마른 가지 위로 진달래와 벚꽃이 만발한다. 그 약하고 여린 것들이 만들어내는 풍경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젖는다. 이제는 에스트로겐이 줄어들 나이가 된 것도 같은데 여전히 나는 감정 과잉의 날을 산다. 꽃 피는 일이 지는 일에 다름없고, 만나 사랑하는 일이 결국엔 이별로 이어지리라는 것을 아는 나이가 되어서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만 하는 것, 모든 생명의 가장 준엄한 의무인 그것이 결국 제 몸에 상처를 새겨가는 일임을 알아서일까.
십 년 전, 아프리카의 탄자니아에서 사파리를 한 적이 있다. BBC의 다큐멘터리 의 무대가 된 세렝게티 국립공원이었다. 야영을 하며 닷새를 머무르는 동안 사륜구동차를 타고 하루 종일 지구의 또 다른 주인을 찾아다녔다. 하면 떠오르는 단어를 묻는다면? 누구나 약육강식, 적자생존, 무한경쟁 같은 단어를 말할 것이다. 우리에게 동물의 세계는 약자가 절대로 살아남을 수 없는 잔혹한 세계로 비친다. 하지만 대초원-세렝게티는 스와힐리어로 끝없는 초원을 뜻한다-에서 짧게나마 들여다본 동물의 세계는 내게 전혀 다른 느낌을 주었다. 그들의 세계는 인간의 세상보다 더 '인간적'으로 보였다.
그곳의 수많은 동물 중에 인간에게 가장 인기 있는 동물은 백수의 왕 사자였다. 덕분에 사자가 사냥하는 모습을 몇 번이나 보았지만, 한 번도 성공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오랜 시간 기다리고, 몇 번의 실패를 반복해야 겨우 먹이를 마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무리에서 떨어진 어린 임팔라나 늙고 병든 가젤을 노려야 한다. 사자에게 날카로운 이빨이 있다면 임팔라나 가젤에게는 빠른 발이 있다.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생명은 저마다 생존에 필요한 힘과 지혜를 갖추고 태어난다는 것을, 아무리 하찮아 보이는 생명도 저마다의 존재 이유를 지니고 있음을 그곳에서 깨달았다. 가까스로 사냥에 성공한 사자가 신선한 고기로 배를 채운 후 떠난 자리에 하이에나가 찾아온다. 초원의 청소부 하이에나가 떠나면 새들이 독수리부터 까마귀, 참새에 이르기까지 크기 순서대로 찾아와 남은 고기를 나누었다. 건기에 물을 찾아 함께 이동하는 얼룩말과 누의 우정도 아름다웠다. 색맹인 누는 후각이 발달해 십 수 킬로미터 떨어진 곳의 물 냄새를 맡을 수 있고, 코가 무딘 얼룩말은 눈이 좋아 포식자가 다가오는 모습을 빨리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서로의 약점을 보완하고 강점을 살려 함께 살아가는 모습이라니. 약자나 소수자를 심리적으로 멀리하고 제도적으로 차별하는 인간의 세계와 얼마나 다른가.
몇 년 전 찾아갔던 일본 홋카이도의 '베델의 집'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베델의 집은 정신장애우들이 함께 모여 생활하는 공간이다. 정신질환을 앓는 이들이 회사를 만들어 1억 엔 이상의 연 매출을 올리며 일본은 물론 외국에서도 화제가 된 곳이다. 그들은 오래 일 할 수 없는 서로의 나약함을 인정하고 한 명이 할 일을 여럿이 나눠 하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안심하고 땡땡이칠 수 있는 회사', '이익이 나지 않는 것을 소중히 여기는 회사'를 일구었다. 그들이 앓고 있는 병은 한 사람이 열심히 살아온 증거이기에 감추지 않고 서로 이야기한다. 약함을 유대로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나는 큰 위로를 받았다. 인간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저마다 마음의 병을 지닌 불완전한 존재가 아닌가. 강한 척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 결국엔 더 큰 병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닐까.
날마다 초록이 짙어지는 봄날에 약한 것들이 지닌 생명력을 떠올려본다. 작고 하찮은 꽃과 나무가 계절의 변화를 이끌어내듯, 약한 존재들이 모여 이 세계의 풍경을 바꾸는 날을 상상한다. 아이와 노인, 성적 소수자와 장애인, 이주노동자와 비정규직 같은 우리 세계의 모든 약자들이 이루어낼 거대한 변화를.
김남희 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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