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고였다. 어머니도 "무슨 방법이 없겠냐"며 소리 내 울기 시작했다. 얼마나 마음이 아프면 처음 찾아온 진료실에서 모자가 갑자기 함께 흐느낄까 싶었지만 "수술도 괜찮다" "호르몬 치료라도 해달라"는 아이와 어머니를 단념시켜야 하는 게 의사로서의 의무였다. 만 열여섯 살인 아이의 성장판이 이미 닫혀 있었기 때문이다.
키가 158㎝ 남짓이니 170㎝ 가까이 될 또래 친구들에 비하면 분명 작다. 말 못하고 속앓이 했을 아이가 못내 안쓰러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칼 대고 약 먹이는 건 안될 말이다. 이 시점에서 아이에게 필요한 건 키와 자신감은 별개라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것이다. 심계식(50) 강동경희대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는 "외모 말고도 앞으로 빛을 발할 수 있는 네 능력은 얼마든지 많다"고 아이를 다독였다.
"하이티즘 부추기는 사회"
심 교수가 수술도, 호르몬 치료도 어렵다고 아이와 어머니를 설득한 데는 이유가 있다. 뼈를 늘려 키를 키우는 수술은 남아의 경우 다 자란 키가 150㎝도 안 될 때 하는 게 원칙이기 때문이다. 또 성장판이 닫혀 이미 성장이 멈춰버린 아이에게는 호르몬 같은 약물이 효과가 없다. 그런데도 수술 받겠다, 호르몬 주사 맞겠다는 아이나 부모가 사실 적지 않다.
"병적인 저(低)신장이라면 오히려 제가 치료를 권하죠. 그게 아닌 경우에는 심리적 문제를 해결해주면 대개는 많이 좋아져요. 키 작은 아이들은 자기 키에 대한 불만족 때문에 정서적으로 불안정하거나 사회성이 떨어지거나 자존감이 결여되는 경우가 많은데 상담을 통해 이런 문제를 스스로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겁니다."
의학적으로 진짜 작다고 보는 기준은 같은 성, 같은 연령의 아이 100명을 무작위로 뽑아 키 순으로 줄 세웠을 때 앞에서 세번째 안에 드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선천적인 저신장도 실제로 치료가 필요한지는 따져봐야 한다. 의학적 기준으로 저신장이 아닌 키는 대개 "상대적인 개념"이라고 심 교수는 강조한다. 평균보다 아주 작지 않아도 주위에 큰 사람이 많으면 비교하게 된다는 얘기다. 특히 매스컴이 장신만 띄워주니 어느 새 '하이티즘(Heightismㆍ키 우월주의)'이 판치는 사회가 됐다고 심 교수는 꼬집는다.
"얼만큼 키가 컸으면 좋겠냐고 물어봤더니 남자는 180㎝ 이상, 여자는 167㎝ 이상을 원한다는 조사가 나온 적이 있어요. 유전적으로, 환경적으로 우리 민족이 현재 클 수 있는 평균치보다 훨씬 더 크길 바라는 거죠. 남들을 내려다봐야 한다는 하이티즘이 드러난 결과예요."
국가기술표준원과 대한소아과학회 등의 조사에 따르면 20~60대 한국 성인의 평균 키는 2010년 현재 남자 174㎝, 여자 160.5㎝로 2003년 이후 키 성장이 거의 정체 상태에 있다.
상대 비교보다 중요한 절대 속도
아이들의 키는 70~90%가 유전, 10~30%가 환경에 좌우된다고 의학계는 보고 있다. 성장호르몬 결핍증이나 만성 신부전, 터너증후군, 선천성 기형, 자궁 내 성장지연증 같은 병적 요인이 없을 경우 최종 신장의 대부분이 유전의 영향이라는 얘기다. 일반적인 환경에서 큰 탈 없이 건강하게 자라면 남아는 부모 키의 평균에 6.5㎝를 더하고 여아는 6.5㎝를 뺀 만큼 성장한다. 이 수치보다 10㎝ 이내로 크고 작아도 유전적 측면에서 정상 성장 범위로 친다.
최종 키가 결정되는 시점은 성장판이 닫히는 시기와 일치한다. 성장판은 팔과 다리, 손가락과 발가락, 손목과 팔꿈치, 발목과 무릎, 어깨와 척추, 대퇴골 등 긴 뼈의 끝부분에 있는 연골조직으로 세포분열을 일으켜 뼈를 자라게 만든다. 성장판이 모두 뼈로 바뀌어 더 이상 뼈가 자라지 않는 것을 흔히 '성장판이 닫혔다'고 표현한다. 성장판의 활동으로 뼈가 자라는 정도를 의학에서는 '뼈 나이'로 계산하는데 보통 남아는 뼈 나이가 17~18세, 여아는 15~16세쯤 됐을 때 성장판이 닫히면서 어른 키가 된다.
또래와 키 차이가 유독 나는 아이들은 실제 나이와 뼈 나이가 다른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실제 나이는 열여섯 살인데 뼈 나이가 열네 살이면 '체질적 성장지연'일 수 있다. "성(性)적 발달 저하까지 동반하면 생식샘기능저하증 같은 병이 있을 우려도 있어 주의해야 한다"고 심 교수는 조언했다. 반대로 열여섯 살짜리 아이의 뼈 나이가 이미 열여덟 살이면 나이에 비해 성장이 일찍 멈추는 성조숙증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울면서 치료해 달라던 그 열 여섯 살 남학생이 바로 그런 경우예요. 뼈 나이가 빠르니 처음엔 또래보다 2, 3년 일찍 컸죠. 그러다 어느 순간 더 안 자라고 있다는 걸 알아챘을 땐 이미 성장판이 닫힌 뒤였던 거예요. 이렇게 치료 시기를 놓치면 뾰족한 방법이 없어요."
자녀가 친구들보다 얼마나 큰지를 비교하기보다 해마다 일정 속도로 자라는지를 확인하는 게 더 중요한 이유다. "세 살 이후 사춘기 전까지 1년에 4㎝ 미만으로 자라면 검사를 받아볼 필요가 있다"고 심 교수는 말했다.
키 키워주는 키 작은 선생님
심 교수는 의대생 시절부터 소아 보는 의사가 되기로, 그 중에서도 내분비 분야를 전공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고 보니 웃을 때 입꼬리가 올라가며 장난기가 살짝 스치는 표정이 왠지 만화에 나오는 박사님 캐릭터 인상이다.
"저 자신도 작은 편이어서 키 때문에 고민하는 아이들에게 많은 조언을 해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성장이 너무 빠른 아이들에게 부작용은 최소화하면서 키는 최대한 키울 수 있는 더 나은 방법을 개발하려고 연구도 하고 있죠."
진료 분야의 특성상 아이들과의 교감이 필요하지만 짧은 시간 안에 되도록 많은 환자를 봐야 하는 국내 의료 현실에선 쉽지 않다. "하나나 둘 낳아 잘 키우려는 사회 분위기 때문에 소아 진료의 질과 난이도가 점점 높아진다"며 "소아 진료 환경의 개선이 저출산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심 교수는 강조했다.
임소형기자 precar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