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월하고 힘있는 데뷔작이다. 그의 다음 작품이 기다려진다."
미국의 명감독 마틴 스코세이지가 지난해 12월 모로코 마라케시국제영화제 심사위원장으로서 한국의 독립영화 '한공주'를 보고 남긴 소감이다. '한공주'는 이 영화제에서 대상인 황금별상을 받았다.
노대가의 상찬은 과찬이 아니다. '한공주'는 섬세한 마름질과 꼼꼼한 이음새가 빚은 영화다. 잘 재단된 옷감을 촘촘하게 바느질 했는데 땀이 드러나지 않은 옷과 같다. '한공주'는 세계 최고 권위의 독립영화 축제인 로테르담국제영화제의 타이거상(대상)과 스위스 프리부르국제영화제 대상 등도 수상했다. 수작에 대한 온당한 대우다. 그러나 최근 만난 이수진 감독은 "촬영 중 최고의 목표는 '포기하지 말자'였다"고 말했다. '한공주'는 37세 이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이 감독은 '한공주'의 제작과 각본작업까지 도맡았다.
영화는 제목과 같은 이름의 여고생 한공주(천우희)의 수난을 그린다. 이름이 무색하게 공주는 성폭행 피해자로 치유 받기는커녕 정신적 육체적 고통에 시달린다. 이 감독은 "어릴 때 주변에서 많이 사용되던 공주 애칭을 언젠가 주인공 이름으로 써보고 싶었다"며 "이름과 반대되는 현실의 아이러니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영화의 소재는 밀양여중생성폭행 사건이다. 이창동 감독의 '시' 등 여러 영화에서 다룬 재료다. 이 감독은 "성폭행뿐 아니라 중고생의 자살, '셔틀'(친구나 선배에 의한 강압적인 심부름을 의미하는 은어) 등 오랫동안 잊히지 않는 사건들이 모여 영화가 됐다"고 말했다. 그는 "워낙 많이 다룬 소재라 나까지 영화로 그릴 필요가 있을까 생각도 했다"며 "극단적인 상황에 놓인 한 소녀가 스스로를 포기하지 않으려는 모습에 초점을 맞추려 했다"고 덧붙였다.
영화 속 한공주는 불행에서 벗어나려 애쓰지만 사회가 만든 높고 두터운 벽에 부딪힌다. 주인공을 비극의 모서리로 몰아넣는 감독이 야속할 정도로 영화는 매정하다. 이 감독은 "희망은 밝은 흰색이라기 보다 밝은 회색이라고 생각한다"며 "제대로 된 희망은 영화가 끝난 뒤 우리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청소년관람불가 등급을 받을 영화라 생각했으나 고교생도 보고서 어른과 이야기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영화"라며 작은 아쉬움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 감독의 대학 전공은 사진이다. 2002년 대학 4학년 때 "인생에 영화 한 편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11분짜리 단편을 만들었다. "단편영화제까지 진출해 영화 전공 경쟁자들의 작품을 보면서 신세계를 접한 기분이었다"고 했다. "2년만 해보자"고 시작한 영화는 10년 넘게 그의 삶을 지배했다.
"2년이 지난 뒤 또 2년만 해보자는 식이었어요. '한공주' 만들 때도 '이번만 하자' 생각했어요. 매번 마지막 작품이라 생각하니 후회하지 않게 하자가 목표가 됐어요. 완성될 때까지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습니다. 포기하지 않는 공주에 대한 이야기이니 제가 그만 둘 수가 없더군요."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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