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쯤 되면 국가안보를 책임진 기관들이라고 말하기가 민망하다. 군색해진 작금의 입장과 처지를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다. 그래도 '이건 아닌데'하는 생각이 앞선다. 다른 정부 부처 일이라면 굳이 날 세워 비판할 일은 아닐 것이다. 조직과 수장을 보호하려는 공직자들의 공명심과 충성경쟁이라는, 늘상 있는 일로 치부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국가정보원, 국방부는 다르다. 이 기관들은 비밀, 정보, 첩보 같은, 함부로 발설해선 안 되는 일을 취급하는 곳이다. 국가기밀을 앞세워 기자들의 취재에 늘 차단막을 치는 곳이 국정원과 국방부다. 그런 두 기관의 최근 깜짝 변신은 그래서 놀랍다.
국방부는 그제 현재 운용 중인 국산 무인정찰기 '송골매'와 내년 실전 배치될 '리모아이'를 공개했다. '금강' 'RF-16' 등 첨단 정찰장비의 성능을 입증해 보이는 사진들도 언론에 제공했다. 민간 군사전문가들이나 언론이 이들 장비의 존재를 언급한 적은 있지만 국방부가 장비 존재 자체를 공식 확인하고 제원과 기능들을 상세히 공개하기는 처음이다.
여기서 드는 의문 하나. 국방부는 왜 갑자기 군사비밀의 봉인을 뜯어 버렸을까. 뻥 뚫린 대북 방호망이 야기한 국민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서라고 국방부는 밝혔지만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이는 없다. 그보다는 북한보다 우월하게 축적된 대북 정보수집 능력 성과를 보여줌으로써 청와대 하늘이 뚫린 무인기 사태 국면을 모면하려는 시도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 더구나 청와대가 국방장관 경질까지 검토하고 있다는 보도가 쏟아진 상황이었으니 국방부는 다급했을 것이다. 조직 수장의 낙마를 막기 위해 꼭꼭 숨겨온 비밀의 문까지 열어젖힐 수 있는 곳이 국방부라면 안보 불안은 해소되기는커녕 더 가중될 수밖에 없다.
국정원은 또 어떤가.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 증거조작으로 강압조사 의혹이 불거지자 탈북자들을 조사하는 중앙합동신문센터(합신센터)를 공개하고 건물 사진을 언론에 제공했다. 이 시설은 인터넷 지도 검색서비스에도 나타나지 않는 국가기밀시설. 그럼에도 국정원이 여봐란듯이 언론에 공개한 것은 증거조작 파문과 강압조사 논란으로 궁지에 몰린 상황을 타개하려는 꼼수로밖에 해석되지 않는다. 실제 수용 탈북자들은 과거 이곳에서 조사를 받은 다른 탈북자들의 증언과 달리 국정원을 칭송하기에 바빴다. 국정원이 철저히 통제해 가며 보여주고 싶은 부분과 들려주고 싶은 내용만 공개하는 의도적인 행사였던 셈이다.
그뿐만 아니다. 국정원은 증거조작에 관여한 요원들이 결백하다며 중국에서 활동해온 '휴민트(인적 정보망)' 신분을 노출시켰다. 법정에서 유우성씨에 대해 증언한 북한 보위부 출신 탈북자의 언론 인터뷰를 주선하고, 그로 인해 그가 북한의 딸과 연락이 끊기는 위험한 상황을 초래했다. 정보원이야 노출되든 말든 점점 윗선으로 조여오는 책임추궁의 화살을 피할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한다는 국정원의 무모함이 걱정스러울 지경이다.
이것이 국가안보를 책임진 국정원과 국방부의 현주소라면 그들의 존재 의미는 퇴색할 수밖에 없다. 속수무책으로 무인기에 농락당했으면 철저한 자기 반성을 바탕으로 대응책을 마련하고 응분의 책임을 지는 것이 마땅하다. 그럼에도 국방부는 기밀까지 해제해 가며 조직과 수장 지키기에 나섰다. 그 혜택이 고스란히 북한 몫이 됐다고 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국정원도 안보를 조직 보호의 방패막이로 삼으면서 동시에 어렵게 구축한 정보원들을 노출시키거나 비밀시설을 공개하는 이중적 태도로 스스로의 기반을 허문 것은 자해 협박 행위에 다름 아니다. 증거조작 관여자들을 보호하려고 정보원들을 공개하고 언론 인터뷰까지 시킨 것도 모자라 그 혈육의 안전조차 안중에 두지 않는 모습을 본 다른 정보원들이 앞으로 국정원과 협조적 관계를 유지할 지 의문이다.
위기를 꼼수로 모면하려다 더 큰 위기를 겪는 사례를 국민들은 수없이 봐왔다. 임기응변과 꼼수는 늘 패착으로 귀결되기 마련이다. 신뢰받는 안보의 첫걸음이 무엇인지 두 기관과 그 수장들이 진지하게 고민했으면 좋겠다.
황상진 편집국 부국장 apri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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