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 지점의 여신담당 최모(32) 대리는 최근 실적 부진때문에 고민이다. 자격을 갖춘 중소기업을 찾아가 대출을 권유해보지만 번번히 퇴짜 맞기 일쑤. 은행간 영업경쟁이 치열한 것도 아닌데, 찾아간 기업 대부분이 "요새 자금 지원이 많네요"라며 고개를 젓는다. 최씨는 "선배들의 경우 대출을 해주면서 '줄을 서시오'라고 했다던데, 나는 돈 좀 써달라고 읍소하고 다닌다"고 토로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중소기업 경영진에게 자금을 구할 때 가장 힘든 점을 물으면 대부분 "까다로운 대출심사"라고 말했다. 하지만 요즘은 은행이 먼저 "돈 좀 빌려 쓰시죠"라는 권유가 더 많아졌다. 정부가 추진하는 창조경제를 뒷받침하기 위해 조성한 다양한 정책금융이 시중에 쏟아져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시장에 본격적으로 자금을 풀고 있는 성장사다리펀드가 대표적이다. 금융위원회에 따르면 3월까지 중소ㆍ벤처기업 활성화를 위해 조성된 성장사다리펀드의 규모는 1조9,000억원에 달한다. 이 가운데 운용사가 결정된 6,000억~7,000억원의 자금이 투자가 이뤄졌거나 투자처를 물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연내 추가 조성 정책자금도 상당하다. 중소ㆍ중견기업간 인수합병(M&A) 활성화를 위해 3,000억원(향후 3년 1조원)이 조성되며, 기업이 보유한 지식재산(IP)을 매입하거나 지분에 투자하는 펀드도 최소 1,000억원 규모로 조성된다. 코넥스 시장에 상장한 기업들에도 투자금 400억원이 예정돼 있다. 중소기업청도 2조원에 달하는 벤처펀드를 조성한다는 방침을 밝혔다.
정책자금이 풍부해지면서 유망한 중소ㆍ중견기업들의 자금 조달이 원활해졌다. 정보통신 업체 조모(40) 대표는 "2년 전에 벤처캐피탈로부터 2억원을 투자 받으려 했다가 퇴짜 맞았는데, 얼마 전 벤처캐피탈에서 먼저 자금이 필요하지 않느냐는 연락이 오더라"며 중소기업에 대한 대우가 확 달라졌다고 말한다.
하지만 자금지원과 투자에서 기업 간 부익부빈익빈 현상도 심화되고 있다. 세금으로 조성한 정책자금을 함부로 지원ㆍ투자할 수 없기 때문에 성장성이 있고 재무상태가 건전한 기업에게 자금을 지원해야 하지만 현실에서 그런 기업들을 찾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정책금융을 집행하는 창업투자회사 관계자는 "지원 기준에 적합한 기업을 발굴하기 힘들어, 성장성이 뛰어난 중소기업이나 우수 벤처기업에는 창투사가 투자하겠다며 몰려들고 있다"고 말했다. 이 과정에서 무분별한 투자로 연결될 수 있는 점도 경계해야 할 대목이다. 한 금융공기업 관계자는 "정책자금을 집행하는 것은 금융공기업이나 운용사의 실적과 직결되기 때문에 자칫 대상 기업의 심사 평가를 소홀히 할 가능성도 배제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이대혁기자 selected@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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