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내무부 훈령 410호'에 따라 부랑인을 단속해 수용하던 시설은 전국적으로 36곳에 달했다. 일부 시설은 설립 취지대로 부랑인의 복지를 위해 운영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부산 형제복지원처럼 일반인까지 불법 감금한 뒤 강제노역과 폭행 등을 일삼은 곳도 적지 않다. 당시 야당인 신민당이 조사에 나섰지만 군사정권의 비호로 진상 규명과 책임자 문책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솜방망이 처벌을 받은 후 이름만 바꿔 동일한 시설을 운영하는 사례가 많았는데, 대전 성지원도 그 중 한 곳이다.
야당 조사 폭력으로 막아낸 대전 성지원
형제복지원 사건으로 세상이 떠들썩했던 1987년 2월7일, 부랑인 530여명이 수용된 대전 대화동 성지원에서 원생 20여명이 강제노역 등을 견디다 못해 탈출했다. 당시 형제복지원 진상조사위원회를 꾸린 신민당은 현지 조사단을 파견했지만 노모(72) 이사장 등이 출입을 막았다. 당시 신민당 의원으로 조사에 참여했던 문정수(75) 전 부산시장은 "충남 출신인 송천영 의원을 중심으로 성지원에 갔지만 직원들이 각목을 휘두르며 출입을 막아 몸싸움이 일어났고 진입도 못했다"며 "형제복지원은 검찰 내사를 받던 박인근 원장이 현장에 없어 진입할 수 있었지만 성지원은 이런 한계로 조사를 시작하지도 못했다"고 밝혔다.
또한 김성기 당시 법무부 장관이 "국정조사권이 발동되지 않는 한 대상자가 응하지 않으면 조사활동도 할 수 없다"며 성지원 측을 옹호하는 발언을 해 조사는 난관에 부딪혔다. 이후 원생 220여명이 '집으로 보내달라'며 또 집단 탈출했고, 야당의 문제제기로 수사가 이뤄졌지만 노씨는 징역 10월의 처벌만 받아 부실수사 논란이 일었다.
반복된 인권 유린에도 재기한 노씨 일가
노씨는 사법처리 됐지만 재단 규모는 오히려 커졌다. 1987년 6개 남짓이던 시설은 현재 17개가 넘고, 노씨 일가가 운영하는 복지법인 '천성원'과 '이화'의 지난해 기준 자산은 각각 402억원, 48억원에 달한다.
이 과정에서 같은 재단의 부랑인시설 양지마을에서 벌어진 인권유린은 더 가혹하고 잔인했다. 3m 이상의 담과 쇠창살이 설치된 방에 구금된 수용자들은 월 1만원 가량의 저임금을 받고 공장에서 강제노역을 했다. 인권단체 조사 결과 이를 거부하거나 퇴소 의사를 밝히면 구타 당했고 여성 수용자들에 대한 성폭행, 불법피임시술도 빈번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1998년 검찰 수사로 노씨는 징역 3년, '작은 부인'인 박모씨는 집행유예를 선고 받았다.
이런 전력에도 지자체장 등 선출직 공무원들에게 영향력이 큰 지역 유지라는 점 때문에 당국의 관리감독이 쉽지 않다. 노 전 이사장은 충남 평통자문위원으로 활동하며 관료들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한 것으로 알려졌다.
여준민 형제복지원 사건진상 규명을 위한 대책위원회 사무국장은 "사법처리를 받았더라도 당사자나 그 일가가 계속 재단을 맡으면 운영방식 등은 그대로 이어지기 때문에 인권유린 등 비리가 재발할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87년 부랑인시설 36곳…
1987년 부랑인 수용시설은 36곳으로 알려졌지만 보건복지부는 실태 파악조차 못한 상태다. 한국일보 취재 결과, 당시 운영된 부랑인 시설로 ▲서울마리아수녀회 갱생원 ▲서울시립갱생원 ▲서울시립 부녀보호소 ▲경기 화성 성혜원 ▲인천 삼영원 ▲충북 음성 광성복지원 ▲충남 연기 양지원 ▲대구시립희망원 ▲전남 목포 동명원 ▲전남 해남 희망원 등이 추가로 파악됐다. 이중 양지원에서는 수용자 89명이 숨지고, 광성복지원에서는 방화 등 폭동으로 수백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는 의혹이 제기됐었다.
정승임기자 chon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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