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 정당이 특정 지역에서 3분의 2 이상 의석을 독차지할 수 없도록 선거법을 개정해달라. 이런 제안이 현실화하면 내년 총선에서 과반 의석을 차지한 정당에 내각의 구성 권한을 이양하겠다."
재임 시 이처럼 파격적인 제안을 한 대통령은 누구일까.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그것도 임기 말이 아니라 취임 한 달밖에 안된 시점에 했다. 그러나 정치권은 시큰둥했다. 논의는 진전되지 않았다. 그로부터 2년 후 2005년 2월 국정연설. 그는 다시 "현행 선거구제가 바뀌지 않으면 망국적 지역주의가 극복될 수 없고 국민통합과 선진국 진입도 어렵다"고 했다. 정치권이나 언론은 관심을 두지 않았다.
몇 달 지난 그 해 7월 초, 충격적인 제안을 했다. "진지하게 지역구도를 해소하는 문제로 대통령과 협상한다면 그 이상의 것도 협상할 용의가 있다" "우리 정치의 구조적 문제를 해결한다면 대통령 권력을 내놓겠다. 내각제 수준으로 대통령의 권한을 이양할 용의가 있다" "야당이 손잡고 정권을 달라면 드릴 테니 대화정치 해보자" 등등. 이른바 대연정론이다. 권력까지 주겠다고 했지만 한나라당은 거부했고, 열린우리당 내부에서도 반발이 터져 나왔다. 대연정론은 싹도 못 틔우고 시들고 말았다.
지금도 대연정론은 '몽상가의 넋두리'로 치부된다. 지지율 추락, 연이은 재보선 패배와 여소야대 정국, 언론의 가혹한 공세로 초래된 위기를 모면하려는 전략이었을 뿐이라는 분석이 있다. 무책임한 도피였다는 비난도 적지 않다. 하지만 기회가 될 때마다 끊임없이 선거구제 개편을 역설한 것으로 미루어보면, 대연정론은 지역주의 극복을 위해 모든 것을 건 승부수로 보는 선의의 해석이 더 타당할 듯싶다.
노 전 대통령 외에 다른 대통령들도 비슷한 생각이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줄기차게 지역주의 청산을 외치고 선거구제 개편을 추구했다. 그의 집권 시절인 1999년 5월 공동여당인 국민회의와 자민련은 '중대선거구제+정당명부 비례대표제'에 합의한 바 있다. 이명박 전 대통령도 2009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선거제도를 그대로 두는 한 지역주의는 극복할 수 없다"고 했다. 2010년 신년연설에서는 "배타적 지역주의와 대결정치를 극복하기 위한 선거제도 개편을 반드시 올해 완수하자"고 했다.
대부분 정치지도자들이 선거구제 개편에 뜻을 두었지만 이루지 못했다. 그만큼 소선거구제의 기득권 구조가 강고한 것이다. 따라서 소선거구제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바꿀 수만 있다면, 새 정치나 정치개혁은 상당부분 이룬 셈이나 다름 없다.
그렇다면 소선거구제는 무엇이 문제인가. 민의의 왜곡이다. 부산을 예로 들어보자. 19대 총선 때 부산 지역구의 정당 득표율은 새누리당 49.9%, 민주당 39.2%였다. 비례대표 득표율은 새누리당 61.1%, 민주당 31.8%, 통합진보당 8.4%였다. 그러나 의석은 새누리당 16석, 민주당 2석이었다. 만약 중선거구제나 도농복합형 선거구제, 또는 독일식 정당명부제가 채택됐다면 민주당은 4~6석을 차지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광주, 전남북에서도 새누리당은 10% 안팎의 득표율로 3~4석을 확보할 수 있었지만 현행 소선거구제에서는 전멸했다.
그 결과로 나타난 정치행태는 참혹했다. 새누리당은 부산의 야당 지지자 40%를 외면하고, 민주당은 호남의 여당 지지자 10%를 무시했다. 영호남 의원들은 당 공천이 생사를 가르기 때문에 옳고 그름은 뒷전에 있고 오로지 권력자에 충성을 다하면 그만이다. 대화와 타협이 사라지고 격돌과 욕설이 난무하는 데는 이처럼 소선거구제와 지역주의에 기생한 정치인들이 너무 많고 득세하고 있기 때문이다.
선거구제 개편은 아무나 못한다. 박근혜 대통령이 진지하게 추진하고 야당 지도자들이 호응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별로 관심이 없는 듯하다. 정치는 여의도 정당만의 일이 아니고 나라의 미래와 직결되는 절실한 현장이다. 만약 박 대통령이 선거구제를 개편해 이 망국적 지역주의를 극복하는데 기여한다면, 그것만으로도 큰 지도자로 평가될 것이다. 박 대통령의 뚝심에 기대를 걸어본다.
이영성 논설위원 leey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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