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0월 은퇴 이후 내려놓았던 태극마크가 가슴에 다시 달렸다. 주인을 찾은 양 태극문양이 썩 잘 어울렸다. 햇수로 5년만이다. 한국 남자테니스의 상징이자 자존심 이형택(38)이 국가대표에 이름을 올렸다. 불혹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국가대항전 데이비스컵에 출전하기 위해서다. 남녀테니스 선수를 통틀어 최고령 태극마크의 주인공이다. 대표팀 막내 정현(18ㆍ삼일공고)과는 무려 20년 차이가 난다.
지난 5일 부산 스포원파크 테니스장. 데이비스컵 아시아-오세아니아 1그룹 지역 예선 2회전 복식경기를 앞두고 코트 안팎이 이상 열기를 보였다. 서른 여덟 이형택의 도전이 예고돼 있었기 때문이다.
이형택은 열 다섯 살 아래 임용규(23)와 호흡을 맞췄다. 결과는 세트스코어 1-3완패. 겉으론 역부족이었지만 투지와 열정만큼은 코트를 가득 메우고도 남았다. 실제 남자프로테니스(ATP)투어 무대에서도 '알아주는 복식 파트너' 로한 보파나-사케스 미네니 조를 맞아 2세트를 7-5로 따냈고, 1,3세트도 타이브레이크 승부로 끌고 가는 등 '살아있음'을 증명했다. 또 몸을 사리지 않고 뛰어 다니는 모습에서 겨우내 강도 높은 훈련을 소화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형택은 기자회견에서 '핑계'를 대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경기에 나서는 것이 '비정상적인 상황'이라며 손사래를 쳤다. 특히 복근 부상 등으로 몸 상태가 전성기 때의 60%라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러면서 "파트너 임용규는 분위기가 살아나면 120%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자질을 갖고 있는데, 내가 받쳐 주지 못했다"며 공(功)은 후배에게, 실(失)은 자신에게 돌렸다.
이형택의 대표팀 발탁은 대한테니스협회 주원홍(58) 회장의 '작품'이다. 주 회장은 사실 지난해 초부터 이형택의 코트 복귀를 '은밀하게' 주문했다. 오는 9월 인천 아시안게임을 내다본 것이다. 이형택은 2013년 5월 부산오픈 챌린지 대회 복식경기에 나서며 서서히 '예열'을 가했다. 주 회장은 1년여 '왕년의 테니스 DNA'를 되살린 이형택에게 지난 1월 대표팀 플레잉 코치겸 감독 대행으로 임명했다. 그래서 데이비스컵은 지도자로서 이형택의 능력을 시험하는 무대이기도 했다.
이렇다 할 성적을 거두지 못했지만 이형택은 "주변인이 아니라, 책임자로서 값진 경험을 얻었다"고 소감을 밝혔다. 그는 특히 "한국테니스의 미래는 서비스에 달려있다"고 잘라 말했다. 이어 "주니어때는 서브의 강도가 엇비슷해 차이를 느끼지 못하지만 시니어 무대에선 서브 파워가 승패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서브 고수가 있다면 지옥 끝까지 쫓아가서라도 비법을 전수를 받고 싶다는 이형택은 "단순한 연습과 훈련이 아니라, 생체역학적으로 접근해 대표팀의 고질적인 서브 불안 해법을 찾아보겠다"고 각오를 밝혔다.
현재로선 인천아시안게임 복식경기에 이형택의 출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이형택은 "나를 뛰어넘는 후배를 길러내는 것이 '마지막 소원'이라며 "한국테니스에 내 이름 석자가 잊혀지는 날이 하루빨리 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최형철기자 hccho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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