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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복의 무게

입력
2014.04.06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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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직에서 물러날 때 흔히 '옷을 벗었다'는 표현을 쓴다. 이 말이 그저 비유가 아니라 실제 옷을 벗음으로써 직을 떠나는 직업들이 있다. 경찰이나 군인처럼 제복 차림으로 일상적인 업무를 하는 경우도 있지만, 판사와 검사는 법정이나 임관식 등 공식 행사에 참석할 때만 법복(法服)을 갖춰 입는다. 같은 옷이라도 법정, 나아가 법의 권위를 상징하는 법복을 입고 벗는 행위는 여느 제복과는 다른 무게를 느끼게 한다. 법정에서 검사와 변호사, 소송 당사자들을 내려다 보는 윗자리에 좌정해 재판을 진행하는 판사의 법복은 더욱 그렇다. 그래서 아무나 입어서도 안 되고, 아무렇게나 벗어 던져서도 안 된다.

양승태 대법원장은 지난 1일 서울 서초동 대법원 청사에서 열린 신임 법관 임명식에서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은 오늘 이 자리에서 법복을 입음으로써 세속의 기준을 초월한 법관으로서 고매한 인격의 경지를 지향하겠다고 서약하였습니다. 만일 그 의무를 다하지 못하고, 입은 법복에 마땅히 따라야 할 내면적 가치를 보여주지 못한다면 오늘의 서약을 깨는 것이며, 비록 법관의 직함을 지니고 있다 해도 법률기술자에 지나지 않을 뿐 진정한 법관이라 할 수 없음을 가슴 깊이 새겨야 할 것입니다." 일부 구투(舊套)의 과장된 표현이 보이지만, 법복의 무게를 한 순간도 가벼이 여기지 말 것을 강조하려는 뜻이겠다.

양 대법원장은 이 자리에서 "법관으로서의 본분을 지킬 수 없다고 생각될 때에는 사법부를 용감히 떠나라"는 가인 김병로 선생(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의 일갈도 인용했다. 법관이 "다른 목표를 위한 수단이 되어서도 안 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어디 신임 법관들 뿐이랴. 평소 같으면 의례적인 훈화로 흘려 들었을 대법원장의 당부일테지만 최근 30년 가까이 입던 법복을 벗은 두 고위 법관 때문에 두고두고 곱씹게 된다.

장병우 전 광주지법원장은 2010년 조세포탈 혐의로 기소된 허재호 전 대주그룹 회장의 항소심을 맡아 벌금 254억원을 일당 5억원짜리 노역으로 대신할 수 있게 한 이른바 '황제 노역' 판결이 뒤늦게 논란이 되면서 옷을 벗었다. 이 와중에 대주그룹 계열사와의 부적절한 아파트 매매 거래 사실도 드러났다. 장 전 원장은 스스로 사표를 던졌고, 대법원이 "위법 사실은 없었다"며 감찰 없이 사표를 수리해 퇴임식을 거쳐 물러났다.

앞서 최성준 전 서울고법 부장판사는 신임 방송통신위원장에 발탁돼 옷을 벗었다. 현직 고위 법관이 행정기관 수장으로 옮겨가는 것이 삼권분립의 원칙과 법원의 독립성을 훼손할 수 있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국회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세금 탈루, 부동산 투기 등 의혹이 제기됐고, 방송ㆍ통신 분야에 관한 전문성이 현저히 떨어진다는 지적도 나왔다. 하지만 지방선거를 앞두고 야당이 발을 빼며 인사청문보고서가 채택돼 곧 임명을 앞두고 있다.

결과만 놓고 보면 장 전 원장은 법관으로서는 치욕스런 불명예 퇴진이고, 최 후보자의 경우 영전(榮轉)이라 할 만하다. 과연 그럴까. 개인적 관점을 떠나 그들이 몸 담았던 법원과 동료 법관들 입장에서 보면 평가가 달라질 수 있다. 장 전 원장은 사법부에 대한 신뢰를 뿌리째 흔들었다는 비난을 받았지만, 법관의 재량에 맡겨두던 노역 일당과 유치기간의 기준을 새로 만들고 향판(鄕判ㆍ지역법관) 제도의 문제점도 고치는 계기가 됐다.

반면 최 후보자의 영전이 법원에 남긴 것은 무엇일까. 현직 고위 법관을 행정기관장으로 무람없이 뽑아 가도 떳떳하게 비판 한마디 하지 못하는 초라한 사법부의 현실을 그대로 드러냈을 뿐이다. 양 대법원장이 전관예우 관행을 근절하고 사법부의 독립성을 강화하기 위해 야심 차게 추진해온 평생법관제도 법원장을 마치고 일선 재판부에 복귀한지 한 달여 만에 청와대의 '러브 콜'을 받고 훌쩍 떠나 버린 최 후보자 탓에 흔들리고 있다.

국민이 사법부에 바라는 것은 양 대법원장의 말처럼 "신의 역할이라도 대신할 수 있을 정도의 완벽한 인간이기를 기대하는 마음"도 아니고, "세속의 기준을 초월한 고매한 인격의 경지를 지향"하라는 것도 아니다. 그저 법과 양심에 따라 상식에 어긋나지 않게 판결하고 처신하라는 것이다. 법복의 무게는 상식의 무게다.

이희정 사회부장 jay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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