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태어났지만 무국적자인 A(12)군은 지난해 공부방에서 제주도 여행을 가던 날, 자신의 존재가 '불법'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 주민등록번호도 외국인등록증도 없는 A군은 비행기를 타지 못했다. 방글라데시 아버지와 필리핀 어머니가 불법체류자 신분이어서 A군의 출생등록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나라 어디에도 A군이 태어났다는 기록이 없다. 친구들에겐 일상인 학교 등교와 병원 진료 등이 A군에겐 복잡하고 먼 일이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이 불법체류자란 사실을 친구들을 통해 알게 된 A군은 수녀님에게 종종 "괜히 무섭고 죄를 지은 것 같아 경찰이 지나가면 겁부터 난다"고 털어놓는다.
부산에서 태어났지만 국적이 없는 서모(5)군이 국가의 보살핌에서 외면당하고 있다는 사연(본보 3일자 10면 보도)이 알려진 후 서군이나 A군 같은 미등록 이주아동에게 교육과 진료를 받을 수 있는 기본적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4일 법무부에 따르면 만 19세 이하 미등록 외국인(불법체류자)은 5,681명(2012년 기준)이다. 이는 외국에서 태어나 부모를 따라 입국한 '중도입국 아동'의 숫자다. 서군이나 A군처럼 한국에서 태어난 미등록 이주아동까지 합하면 1만명이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나라 국적법은 한국에서 태어나도 부모가 모두 외국인이면 한국 국적을 부여하지 않는다. 자국대사관에서 본국법에 따라 출생등록을 해야 한다. 하지만 부모가 불법체류자 신분이면 대사관에서 귀국을 종용하거나 친자확인을 위해 유전자검사를 하는 등 절차가 까다로워 대사관 접근 자체를 꺼리는 이주노동자들이 많다.
서류상 '존재하지 않는' 아이들은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으니 아파도 병원을 마음대로 갈 수 없다. 나이를 확인할 수 없어 미성년자인데도 성인으로 오인돼 형사처벌을 받을 수 있다. 초·중등교육법 시행령에 따라 주변 사람들이 한국 거주사실을 증명하는 인우(隣友)보증서를 제출하면 학교 입학은 가능하다. A군이 이런 경우다. 그러나 학력을 증명하기가 어렵다. 황필규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변호사는 "교육과정을 이수해도 해당 학적이 자신의 것임을 증명하기가 어렵고 졸업장만이 유일한 증거가 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우선 한국에서 태어난 모든 아동의 출생등록을 의무화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말한다. 김사강 이주와인권연구소 연구위원은 "한국에서 태어난 경우 출생등록을 하도록 해 주민등록번호에 준하는 등록번호를 부여 받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2012년 유엔인권이사회 등은 우리나라가 1991년 가입한 유엔아동권리협약과 합치되도록 "자국 영토에서 태어난 모든 아동에게 자동적으로 보편적 출생등록을 보장하기 위해 법을 도입하고 조치를 취하라"고 권고했다. 나아가 중도입국 아동도 일정 기간 한국에서 거주하면 특별체류자격을 부여하는 방안이 논의되고 있다.
하지만 사회적 무관심 속에 제도화가 쉽지 않다. 지난 국회 때도 관련 법이 발의됐지만 우선순위에서 밀려 폐기됐다. 이자스민 새누리당 의원은 상반기 중 출생등록, 중도입국 아동에 대한 특별체류자격 부여 등의 내용을 담은 이주아동권리보장기본법 제정안을 발의할 예정이다.
송옥진기자 clic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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