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새벽 정확한 시간에 울어대는 알람 소리. "아, XX…". 침대에 누운 채 나지막한 욕설로 하루를 시작해 법정 노동시간 동안 그 욕지기를 꾹 누르고 있다가 어둑한 술자리에서 참지 못하고 그걸 토해내길 반복하는 도시인의 삶을 두 글자로 줄이면 '권태'가 될 것이다. 어디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가서 혼자 있고 싶다고 말하는 건, 사실 자신의 삶이 죽도록 권태롭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1만 7,240㎞.
사는 곳이 서울이라면 그 권태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곳까지의 거리다. 마음먹으면 정말 가볼 수도 있는 곳이기에 어쩌면 달이나 화성보다 거긴 훨씬 멀다. 비루한 일상의 잡내가 결코 따라올 수 없을 것 같은 곳. 그곳의 이름은 남극이다. 그런데 거기서 진짜 홀로 있다는 것은 어떤 일일까. 지구로 돌아갈 궤도선을 놓쳐 버리고 달의 표면을 홀로 걷는 것 같지는 않을까. 여기 그것을 감행한 사람의 수기가 있다.
지은이 펠리시티 애스턴은 영국의 여성 물리학자이자 기상학자다. 23살에 처음 남극에 가서 2년 반 동안 그곳에서 살았다. 그것은 기상학자로서의 생활이었으니 처음 그에게 남극은 직장이었던 셈. 그는 두 번 더 남극을 찾아가는데, 그건 탐험가 혹은 여행자로서의 방문이었다. 이 책 는 그가 세 번째 찾아간 남극 이야기다. 2011년 10월 13일, 그는 지구에서 가장 고독한 사람이 되어 세상 모든 권태가 절멸된 공간을 향해 스키를 타고 출발한다. 59일, 1,744㎞의 여행의 시작이었다.
"'내가 왔다!' 나는 소리 내어 웃으며 산을 향해 소리쳤다. '내가 왔다고!' 내 목소리가 주위의 텅 빈 공간에 묻혀 그대로 흩어져 사라진다는 것을 깨닫고 더 큰 소리로 외쳤다. 돌아온 것은 침묵의 메아리뿐이었고 나는 전율을 느꼈다. 이제 출발할 때가 되었다."(73~74쪽)
이 책의 줄거리를 한 문장으로 요약해보자면 이렇다. '나는 혼자였고, 혼자였고, 혼자였고, 혼자였고, 혼자였는데, 혼자여서, 혼자였다.' 절대고독. 남극 대륙을 홀로 횡단하는 사람에게 그것은 존재론이 아니라 물리학의 개념에 가깝다. 이곳은 급한 암릉이 겹쳐있는 히말라야 설산이나 유빙이 떠다니는 북극과도 달라서 풍경마저 끝이 없는 평면, 지평선 너머 지평선일 뿐이다. 남극의 여름(11~1월)은 해마저 지지 않아서 24시간의 구별도 무의미하다. 지은이는 GPS 좌표를 따라 계획된 속도로 계획된 만큼의 '전진'을 계속한다.
"환각 증세가 나타난 게 처음은 아니었다…. 당시는 방향 감각이 마비되는 심한 화이트아웃 현상이 여정의 통상적 특징으로 굳어져 있었고 머리가 빙빙 도는 상태로 이런 화이트아웃 속을 가는 동안 오른편에 보이지 않는 어디선가 작은 남자 한 명이 모습을 드러내는 걸 알아차렸을 때 나는 놀랄 만큼 차분했다."(191쪽)
이 여행은 무척 안전하게, 계획에서 크게 어긋나지 않게 끝난다. 다행이라고 해야 하겠지만 독자의 입장에서 그건 어쩔 수 없는 심심함이다. 죽음 삶의 경계를 넘나드는 설화적 탐험의 기록을 너무 많이 읽은 탓일까. 극한의 환경에서 안전하게 버틸 수 있도록 도와주는 첨단 장비들-예컨대 고독에서 잠시 탈출하게 해주는, 위성전화를 이용한 트위터!-에 이 책의 주인공이 너무 의존하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여튼 너도 나도 권태에 중독된 도시인의 삶에서, 이 책을 읽는 것은 잠깐 해독제가 돼 줄 것이다.
유상호기자 shy@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