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이 명실상부한 스포츠종목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중요한 관문 하나를 힘겹게 통과했다. 대한체육회는 1일 이사회를 열어 바둑을 오는 10월 제주에서 열리는 제95회 전국체육대회(전국체전) 시범종목으로 채택키로 결정했다.
바둑이 2003년 전북 부안에서 열린 제84회 전국체전에서 전시종목으로 채택된 이후 무려 11년 만에 시범종목으로 한 단계 승격한 것이다. 이에 따라 바둑계의 해묵은 숙원인 전국체전 정식종목 채택이 2~3년 안에 이뤄질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바둑은 전통적으로 문화 혹은 예도로 간주돼 오다가 2000년대에 들어오면서부터 체육으로 전환이 추진됐다. 2002년 한국기원이 대한체육회로부터 인정단체 승인을 받았고 이듬해인 2003년부터 지난해까지 11년 동안 줄곧 전시종목(후에 동호인종목으로 명칭 변경)으로 전국체전에 참여해 왔다. 전국체전에서 신규 종목이 인정단체 단계에서 바로 전시종목으로 채택된 것은 바둑이 첫 번째 사례로 당시 체전 개최지인 전북 부안군이 적극적으로 밀어붙여 가능했던 일이다.
이후 바둑의 체육화 작업이 빠르게 진행됐다. 2005년 대한바둑협회가 창립돼 한국기원으로부터 '체육으로서의 바둑' 관련 업무를 넘겨받았고, 2006년 대한체육회 준가맹단체를 거쳐 2009년에 정가맹단체로 승격했다. 드디어 바둑이 어엿한 스포츠종목이라는 사실을 체육계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이후 전국 16개 시도에 바둑협회가 속속 설립됐고, 국무총리배 세계아마바둑선수권대회를 비롯해 크고 작은 국내외 아마추어대회가 잇달아 개최됐다. 특히 2010년에는 중국 광저우에서 열린 제16회 아시안게임에서 바둑이 정식종목으로 채택됐다. 한국 바둑선수단은 남자단체전, 여자단체전, 남녀혼성페어 등 바둑 종목에 걸린 금메달 3개를 싹쓸이해 한국이 아시안게임서 4회 연속 종합 2위를 지키는데 크게 기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둑계의 숙원인 전국체전 정식종목 채택은 좀처럼 이뤄지지 않았다. 신규종목이 전국체전 전시종목으로 지정된 후 3~4년 정도 지나면 대부분 시범종목으로 승격하는 게 통상적인 절차였지만 바둑의 경우에는 체육계의 엄격한 기준 적용으로 인해 계속 전시종목에 머물렀다. 특히 전국 16개 시도바둑협회 가운데 8개 이상이 해당 시도체육회의 정가맹단체가 되어야 한다는 조항에 걸려 아예 정식종목 지정신청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러다 마침내 2012년에 부산, 대구, 광주, 인천, 울산, 경기, 강원, 경남, 전남, 충북, 제주 등 11개 시도바둑협회가 해당 시도체육회로부터 정가맹 승인을 받아 그동안 정식종목 채택에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필수요건을 완전히 충족시켰다.
이에 따라 대한바둑협회는 작년에 다시 '바둑을 전국체전 정식종목으로 채택해 달라'는 신청서를 대한체육회에 제출했고, 지난해 11월 전국체전위원회심의를 거쳐 올해 이사회에서 정식종목 채택의 전단계인 시범종목 채택이 결정된 것이다.
당초 바둑계가 목표했던 정식종목에는 못 미치지만 일단 시범종목으로 채택된 것만도 상당한 성과다.
먼저 바둑의 전국체전 정식종목 채택 일정이 좀 더 가시화됐다. 시범종목 채택 후 2~3년 정도 지나면 정식종목으로 승격되는 게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시범종목으로 채택되면 전국체전 바둑종목 경기 개최 비용은 물론 각 지역의 선수단 구성 및 훈련에 필요한 경비를 해당 시도체육회로부터 공식적으로 지원 받을 수 있다. 지금까지는 전국체전 바둑종목 경기 개최에서부터 각 시도선수단의 대회 참가비용 일체를 바둑계에서 모두 부담했다.
또한 시범종목이 되면 전국 고등학교와 대학교에 정식으로 바둑팀을 만들 수 있는 법적 근거가 확보된다. 지금까지는 일부 초중고교에서 교장의 의지에 따라 임의로 바둑팀을 설치, 운영해 왔지만 앞으로는 교육청으로부터 바둑팀 설치를 정식으로 허가받아 운영할 수 있다. 이밖에 대학교에서도 바둑팀을 공식적으로 창단할 수 있어 다른 체육종목처럼 바둑종목에서도 체육특기자로 고교 및 대학에 진학할 수 있는 문호가 확대돼 엘리트체육으로서의 기반을 구축할 수 있는 전기가 마련될 전망이다.
하지만 이를 뒤집어 생각하면 앞으로의 과제 또한 분명해진다. 시범종목 승격의 효과를 극대화하려면 당연히 학교 바둑팀이 많이 늘어나야 한다. 한국기원과 대한바둑협회는 지금부터 전국 시도바둑협회는 물론 시도체육회, 교육청과 보다 긴밀한 업무 협조를 통해 고교 및 대학 바둑팀 창설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
소년체전 참가도 시급한 과제다. 어느 면에서는 전국체전보다 소년체전 정식종목 채택이 더욱 중요하다. 초중교에 정식으로 바둑팀이 창설되면 바둑 인구 저변확대는 물론 바둑영재의 발굴, 육성이 활성화 되는 등 어린이 바둑교육에 획기적인 발전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시범종목으로 채택된 후 2~3년이 지나면 정식종목으로 승격한다지만 모든 종목이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 더욱이 체육계의 정서가 아직도 바둑의 정식종목 편입에 대해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은데다 앞으로 전국체전 개최 종목을 늘리기는커녕 오히려 현재보다 축소하려는 움직임마저 감지되고 있다. 실제로 아시안게임에서도 개최 종목이 갑자기 축소되는 바람에 바둑이 2014년 인천대회에서 빠져 크게 낭패를 당한 경험이 있지 않은가.
대한바둑협회에서는 올해 시범종목 채택을 발판으로 내년에 소년체전에 들어가고, 내후년에는 전국체전 정식종목 채택을 목표로 하고 있지만 이번 시범종목 승격이 무려 11년 만에 이뤄진 것이라는 생각하면 결코 낙관할 수 없다. 앞으로 바둑계의 모든 역량을 집중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박영철 객원기자 indr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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