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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4월 4일] 문득, 우주는 잔인하다

입력
2014.04.03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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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이다. 가장 잔인하다는 4월. 그 이유를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면 T.S 엘리엇의 에 나오는 그 유명한 시구(詩句),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을 인용하는 모범 답안 외에도 4월 혁명 같은 역사적인 사건들이 많아서, 4월에는 공휴일이 없어서, 세금 신고를 해야 하기 때문에, 심지어 연예인들의 사고가 많은 달이라는 둥 별별 이야기가 많다. 나에게도 4월은 잔인하다. 4월이면 어김없이 막내 동생의 기일(忌日)이 돌아온다. 목련의 꽃망울이 툭툭 터지고 벚꽃 잎의 흰빛이 발광할수록 기억은 더욱 또렷해진다. 특별할 것 없는, 통속적이고 평범했던 지난 시간의 조각들이 결코 바래지 않고 문득 선명해지는 이유를 나는 알 수 없다. 그렇다 '문득'. 이 모든 잔인함은 '문득'에서 오는 것이다. 구원이 될 뻔한 망각은 문득 각성되고 애써 두고 온 것들도 문득 되돌아온다.

올해 초, 소량으로 인쇄되는 독립출판물을 전시, 판매하는 종로구 통의동의 서점 북소사이어티를 돌아보다가 한 권의 책을 발견했다. 얼핏 문학과 지성사(이하 문지)의 시인 선인 줄 알고 집어 들었는데 문지의 책과 비슷한 판형에 디자인도 거의 비슷했지만, 가까이 들여다보니 출판사 이름이 '문학과 죄송사'다. 뒤표지에는 조그맣게 '죄송합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표지를 보고 무슨 재미난 패러디인가 킥킥거리며 책장을 펼치다 그만 발바닥이 땅에 붙어 버렸다.

'아침. 나는 아름다운 골목길을 발견하였다. 언제나 아침. 병원으로 가는 길. 청바지 뒷주머니에 꽂힌 나의 왼팔에 마치 빙의된 듯 꼬옥 매달린 눈먼 신부전증 아버지와 함께. 우리는 아름다운 골목길을 발견하였다. 이해해줄 것 같았다. 아름다운 골목길은 이해해줄 것 같았다. 겨울, 아침이었지만. 가로로 나뉜 햇볕은 따뜻하게 이해해줄 것 같았다. 이기를 이해해줄 것 같았다. 이후를 이해해줄 것 같았다. 불효를 이해해줄 것 같았다. 이제 그만 아버지의 손을 놓아도 이해해줄 것 같았다. 돌아보지 않고 걸어도 이해해줄 것 같았다.'

박준범의 시집 에 수록된 첫 번째 시의 제목은 '문득'이다. '점심 식단을 이미 어제 저녁을 먹기도 전에 받는' 병원에서의 생활은 한 치의 오차도 허용되지 않는 예상 가능한 미래다. '우주는 사람들의 순서를 정해주었고 차례가 다가오자 슬며시 손을 흔들며 웃어 보였지만 우주와 나의 우주 사이에서 우주는 잔인하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시 속의 화자는 '부서진 방문의 사연'에 귀를 기울이고 '내 몸의 흉터처럼' 만져보려 한다. '문득 3,100원어치의 아이스크림을 사듯' 다가온 아버지의 죽음, 그 사이로 '차갑게 웃고 있는 편의점 도시락' 같은 현실을 덤덤한 자조와 간결한 분노로 내뱉는 박준범의 시어들을 들여다보면서 아주 오래전에 읽고 읽었던 문지의 시집, 김중식의 가 떠올랐다. 공교롭게도(어쩌면 이것도 의도된 것일까) 책에 수록된 첫 번째 시의 제목은 '이탈한 자가 문득'이다.

'우리는 어디로 갔다가 어디서 돌아왔느냐 자기의 꼬리를 물고 뱅뱅 돌았을 뿐이다. 대낮보다 찬란한 태양도 궤도를 이탈하지 못한다. 태양보다 냉철한 뭇별들도 궤도를 이탈하지 못하므로 가는 곳만 가고 아는 것만 알 뿐이다. 집도 절도 죽도 밥도 다 떨어져 빈 몸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보았다. 단 한 번 궤도를 이탈함으로써 두 번 다시 궤도에 진입하지 못할지라도 캄캄한 하늘에 획을 긋는 별, 그 똥, 짧지만, 그래도 획을 그을 수 있는, 포기한 자. 그래서 이탈한 자가 문득 자유롭다는 것을.'

1993년에 시인이 집도 절도 죽도 밥도 다 떨어진 빈 몸으로 돌아와서나 볼 수 있다고 한 이탈한 자의 자유는 박준범에 이르러 '그래 이제부터는 화이바를 벗고 머리를 긁어야지'라는 머쓱한 다짐이 되었다. 화이바를 쓰고 머리를 긁으니 시원할 턱이 있나. 궤도의 안인지 밖인지 분간도 못하고 화이바를 쓰지도 벗지도 못하는 엉거주춤한 4월, 이 잔인한 계절에 나는 시를 읽으며 버텨야겠다.

이정민 미술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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