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념은 버리겠습니다. 아무 조건도 내세우지 않겠습니다. 앞으로는 화해와 상생만이 있을 겁니다."
제주 4·3 희생자 추념식을 하루 앞둔 2일 제주시 신산공원에 세워진 4·3해원방사탑(解冤放赦塔) 앞. 지난 60여년을 원수처럼 살았던 제주4·3희생자유족회 정문현(68) 회장과 전직 경찰관 단체인 제주도재향경우회 현창하(75) 회장이 손을 맞잡았다. 이름 그대로 원을 풀고 잘못을 용서하는 탑 앞에서 이들은 앞으로의 시간은 치유의 세월이 될 것이라고 다짐했다.
3일 제주 4∙3평화공원에서 열릴 올해의 추념식은 사건 발생 66년만에 국가추념일로 지정되고 열리는 첫 추념식이다. 정문현 유족회장은 "4·3사건으로 인해 도민 다수가 목숨을 잃고 고통을 당했으며 연좌제로 수십년을 시달렸다. 늦었지만 국가추념일 지정을 환영한다"며 "이를 계기로 그 동안 끊임없이 이어진 소모적이고 해묵은 이념논쟁이 종식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현창하 경우회장도 "한 시대의 비극 속에 누구는 가해자, 누구는 피해자가 아니라 제주도민은 모두 피해자"라며 "도민 갈등을 치유하고 화합을 통해 제주 발전에 기여하겠다"고 말했다.
지난 60여년 동안 4ㆍ3사건은 희생자와 진압 경찰에게 '무고한 주민 학살'과 '좌익의 폭동'이라는, 전혀 다른 사건이었다. 이들은 서로를 불신, 냉대하고 오직 자기들의 주장만 옳다며 등을 돌리고 살아왔다. 그런 이들이 60여년만에 엉킨 실타래를 풀기 위해 손을 맞잡은 건 지난해. 지난해 12월 희생자 유족들과 전직 경찰들은 4·3사건 당시 토벌작전에 동원됐다가 전사한 경찰이 묻힌 충혼묘지와 희생자들의 위패가 모셔진 4·3평화공원을 나란히 참배했다.
정 회장은 "1년 전까지만 해도 서로 상대가 가해자라는 입장이었지만 계속 만나보니 당시 우리가 모두 피해자였음을 깨닫게 됐다. 결국 그분들(경찰)도 살려고 남을 죽여야 했던 시대의 피해자 아닌가"라고 말했다. "유족 대부분은 가해자를 가려 처벌을 하길 바라지 않는다"고도 했다. 현창하 경우회장도 "최근 일부 보수단체가 4·3희생자 위폐 중 폭동의 주범이 있다고 주장했지만 (이런 사실을 가려내기보다) 우선 억울한 죽음 앞에 추념하는 게 갈등의 반목을 끊는 길"이라고 강조했다.
오랜 세월 역사의 그늘에 묻혀 있던 4·3사건은 1990년대에야 비로소 공론화되기 시작해2000년 특별법 공포를 거쳐 2003년 정부의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가 확정됐다. 2006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 4·3 위령제에 국가 원수로 처음 참여한 데 이어 올해부터는 국가추념일 행사로 치러지는 등 4·3사건은 완전한 해원을 향해 조금씩 나아갔다.
하지만 3일 추념식에 박근혜 대통령은 참석하지 않을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생존 희생자 및 유족에 대한 생활보조금 및 의료비 지원은 여전히 미진하다. 정부가 현재까지 확정한 4·3사건 희생자와 유가족 4만5,285명 가운데 정부 지원을 받는 생존 희생자(월 8만원)와 유족(80세 이상 월 3만원)은 각각 124명, 1,892명으로 약 5% 수준이다. 또 2012년 12월부터 2013년 2월까지 추가 신고된 희생자 383명과 유족 2만8,627명에 대한 심의ㆍ결정도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다. 4∙3 단체 관계자들은 "국가추념일 지정은 이제 시작일 뿐"이라며 "국민적 공감대를 바탕으로 남은 현안들을 단계적으로 풀어나가야 한다"고 지적했다.
제주=정재환기자 jungj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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