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참 우스워졌다. 우크라이나 사태에서 미국의 무기력한 모습을 보면서 드는 생각이다. 쏟아지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여전히 뾰족한 카드를 내놓지 못한다. 크림반도를 무혈 접수한 러시아는 크림합병 인정은 물론 한발 더 나가 우크라이나의 정치ㆍ군사 중립화, 연방제 실시 등을 요구해 도발의 수위를 높였다. 여차하면 러시아계가 많은 동남부까지 영향권 안에 두겠다는 심산이다. 그런데도 오바마 대통령의 반응은 "이미 벌어진 사태를 되돌릴 방법이 없다"는 게 고작이다. 러시아는 펄펄 나는데 미국은 설설 기는 형국이다. 훗날 미국 리더십 추락의 상징으로 우크라이나 사태가 거론될지도 모른다.
미국의 이런 모습이 처음은 아니다. 미국은 지난해 11월 우방들의 거센 반대를 무릅쓰고 이란과 핵 협상을 타결 지었다. 저농축 우라늄 생산 인정 등 이란의 핵 권리를 사실상 수용했다. '핵프로그램 불가'를 외치며 전쟁도 불사한다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다. 그 외교적 후폭풍을 미국은 지금 혹독하게 겪고 있다. 70년 동맹인 사우디아라비아는 "미국에 의존하는 방위정책을 재검토하겠다"고 하고, 혈맹 이스라엘에서는 "미국은 정신차려라"는 험악한 말이 여과 없이 터져 나온다. 오바마 대통령과 케리 국무장관은 두 나라를 번갈아 돌며 이들을 달래기에 정신이 없다.
시리아 내전도 그렇다. 화학무기 사용을 '레드라인'이라고 수 차례 경고했음에도 아사드 정권이 화학무기 사용을 강행했을 때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했다. 아사드 정권을 지지하는 러시아의 중재로 '화학무기 폐기'라는 어정쩡한 합의를 본 게 전부다. 수십만명이 사망한 민간인 학살의 책임은 묻지도 못했다. 그 사이 피의 내전은 계속되고 있다. 이란과 시리아에서 드러난 미국의 소극적 태도가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이라는 대담한 행동으로 이어졌다는 헤리티지 재단의 분석이 무리가 아니다.
그럼 한반도는 어떤가. 우크라이나가 핵 포기의 대가로 영토와 안보를 보장받았던 부다페스트 합의서가 휴지조각이 되면서 북한 정권의 핵에 대한 집착이 더 강해질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국토가 찬탈되는 것을 무기력하게 지켜봐야 하는 현실이라면 북한 비핵화를 위한 6자회담이 더 어려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은 미국에 안보를 맡기다시피 하는 우리에게 더 큰 발등의 불이다. 북핵 문제를 포함해 미국 영향력의 향배에 따라 우리의 '핵심 이익'이 침해될 여지가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패권국가로서 야욕을 노골화하는 중국, 패전국에서 다시 군국주의의 길로 나아가려는 일본 등 한반도 주변은 냉전 종식 이후 가장 불안정한 지정학적 구도가 형성되고 있다. 힘에 의한 세력확장, 배타적 민족주의 등에서 중국은 러시아와 비슷한 면이 많다. 경제력에서는 러시아를 훨씬 능가한다. 북한의 급변사태 발생시 중국이 러시아처럼 자국이익 보호를 명분으로 북한에 개입하는 상황이 오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당장 일본과 영토분쟁 중인 센카쿠 열도에 중국이 군사력을 동원할 때 미국이 어떤 선택을 할 지 의문이다. 우크라이나에서의 미국의 무기력이 아시아에서 중국의 대담한 행동을 촉발할 수 있다는 얘기다.
미국은 지금 북한 핵문제에 단호하다. "북한은 사악하다"(케리 국무장관)고 하고, 의회는 "북한 정권을 파산시키겠다"며 고강도 금융제재 법안을 추진하고 있다. 북한 김정은을 반인권 범죄자로 국제법정에 세우려는 유엔의 움직임에도 보조를 맞추고 있다. 6년 가까이 개점휴업 중인 6자회담은 언제 재개될 지 기약이 없다. 북한에 사전조치를 요구하고, 중국에는 "북한을 압박하라"는 똑 같은 말만 수년 째 반복하고 있다. 미국에 고립주의가 득세한다고 한다. 국제분쟁에서의 소극적 태도를 현실론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도 있다. 미국의 북핵 입장이 과거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는 확고한 원칙에 따른 것이라면 괜찮다. 그러나 먼저 움직이지 않으려는 태도가 미국 내 이런 분위기와 맞물린 것이라면 상황은 달라진다. 최소한 미국을 추종하는 생각만큼은 이 기회에 바꿀 필요가 있다.
황유석 논설위원 aquariu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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