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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을 지키려는 자와 지우려는 자의 싸움을 그렸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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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을 지키려는 자와 지우려는 자의 싸움을 그렸죠"

입력
2014.04.02 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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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지만, 사람은 죽어 온갖 잡동사니를 남긴다. 그 중엔 사자(死者)가 남기고 싶지 않은 것도 있을 터. 누군가와 주고받은 편지, 컴퓨터 하드디스크에 저장한 데이터, 인터넷에 남긴 수많은 흔적… 김중혁(43)의 세 번째 장편소설 (문학과지성사 발행)에 나오는 '딜리터'(deleter)는 요청에 따라 고객이 죽으면 뭔가를 지워 주는 사람이다. 고인이 남긴 인터넷의 흔적을 지워주는 서비스가 실제로 생긴 걸 보면 딜리터도 곧 나타날 듯하다.

딜리터라는 직업은 김중혁의 탐정소설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했다. "탐정소설을 써보고 싶은 마음이 예전부터 있었습니다. 국내에선 흔치 않지만 서구에는 탐정소설의 전통이 있잖아요. 탐정이 추리하는 형식이 소설 플롯으로 써먹기 좋거든요. 여러 탐정을 생각하다 뭔가를 찾아주는 탐정이 아니라 지워주는 탐정도 있을 수 있겠다 싶었죠. 그러던 차에 소설가 김연수와 '우리 둘 중에 한 명이 먼저 죽으면 산 사람이 바로 달려가서 상대방의 하드디스크를 물에 담가버리자'고 농담했는데 그게 구체적인 설정의 시작이었죠."

의 주인공 구동치는 딜리터다. 탐정이지만 레이먼드 챈들러나 대실 해밋 같은 미국 하드보일드 작가의 범죄소설 속 탐정과 다르다. 냉소에 찬 멋쟁이도 아니고, 거칠고 거만한 마초도 아니다.

정통 하드보일드 범죄소설이 딱딱한 완숙 달걀 프라이라면 이 소설은 말랑말랑한 반숙 달걀 프라이다. 차갑고 건조한 하드보일드 소설과 달리 이 소설에는 온기와 습기가 있다. 재치 넘치는 위트와 유머, 인물들 사이의 친밀감이 촉촉한 기운의 주 원료다. 그는 "동네 아저씨들이 주인공이 되는 상황 속에 탐정을 넣고 싶었다"며 "기존 장르에 대한 나만의 해석"이라고 설명했다.

소설의 주요 공간은 구동치의 사무실이 있는 악어빌딩. '땅을 깊게 판 다음 음식물 쓰레기와 동물 사체, 곰팡이, 사람의 땀, 녹슨 기계를 한데 묻고 50년 동안 숙성시키면' 날 법한 냄새로 가득한 건물이다. 탐정 사무실에 쉰 살 정도로 보이는 엔터테인먼트 대행사 대표 이영민이 찾아오고 때마침 배동훈 고객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이영민과 배동훈은 같은 테니스클럽 회원이다. 배동훈은 또 다른 클럽 회원인 연예기획사 노블엔터테인먼트 천일수 회장에게 뮤직비디오 제작을 의뢰 받은 뒤 숨졌다. 배동훈의 요청에 따라 그의 태블릿 PC를 찾는 구동치. 그걸 찾고 있는 누군가가 또 있다.

소설은 숨겨진 비밀을 찾으려는 자와 지우려는 자의 싸움을 그린다. 구동치는 누군가의 비밀을 찾아 지우고 버리는 대신 자기만 아는 곳에 따로 간직한다. '굳이 물건을 없애는 것보다는 물건의 위치를 바꾸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구동치에게 세계는 두 가지로 나뉘는데, '나를 둘러싼 세계와 내가 모르는 세계'다. 두 세계에서 완전히 없애는 것이 풀 딜리팅(full deleting)이면 나를 둘러싼 세계에서 내가 모르는 세계로 옮기는 건 하프 딜리팅(half deleting)이다. 내 비밀이 내가 모르는 세계로 흘러가는 걸 막는 일, 그건 소설 속 인물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 원하는 게 아닐까. 죽은 뒤 실제보다 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은 욕심, 구동치에게 그건 '삶을 더 세게 거머쥐려는 추한 욕망'이다.

"비밀이란 지키는 것이지만 지우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모두 지운 다음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은 게 진짜 비밀인지도 모릅니다. 지우는 게 결국 뭘 남길지 고민하는 일이라면, '나를 둘러싼 세계'에서 지키고 싶은 것만 남기는 것이 최종적으로 바라는 '나'의 모습이 아닐까요. 생각해 보면 구동치가 하는 일이 쓰고 지우는 일을 반복하는 소설가가 하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겠죠."

고경석기자 kav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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