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정에 퇴근해도 눈치가 보여요. 쏟아지는 규제개혁 제안을 처리하느라 눈코 뜰 새가 없습니다."
규제개혁 주무기관인 규제개혁위원회 직원들은 요즘 대부분 파김치 신세다. 대통령 주재 규제개혁장관회의가 생중계된 지난달 20일부터 규제개혁 제안이 빗발치고 있기 때문이다. 20일부터 30일까지 10일간 규제정보포털(better.go.kr)의 '규제개혁신문고' 코너에 접수된 제안이 726건에 이른다. 이는 지난해 1년 접수량 300여건의 2배에 달한다. 방송을 계기로 그 동안 골치 아팠던 문제들의 원인이 '규제'때문으로 생각하게 된 듯하다.
제안들을 보면 직업과 거주지역, 관심사가 저마다 다른 사람들이 일상에서 마주친 다양한 불편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관료들은 못 보는 낡은 규제, 부당한 규제들이 드러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예컨대 개발제한구역에 사는 한 주민은 20일 '제발 화장실을 설치하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개발제한구역 안 창고가 집과 멀리 떨어져 있는데, 창고에서 일을 하다가 '매우 난감한 상황이 많다'는 하소연이었다. 현행법은 개발제한구역에는 공중화장실만 설치하도록 하고 있다.
오토바이 운전자는 구체적 경험을 털어놓으며 규제개선을 요구했다. 이륜차는 현행법 상 도로 바깥쪽 차선만 이용할 수 있게 제한돼 있는데, 우회전 차량을 피하기 위해 바깥 차선을 벗어났다 차선위반으로 과태료를 무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 운전자는 "이륜차 운전자도 대한민국 국민인데 왜 자동차 운전자들과 매번 싸워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불만을 토했다.
규제 개혁 제도의 비효율성과 정부의 굼뜬 대응에 대한 불만도 있다. 지난달 20일에는 '건의 받는 싸이트부터 개혁하라'라는 제안이 올라왔다. 제안자는 "못 배우고 바쁜 사람들이 법령 이름까지 정확히 알고, 건의 내용을 첨부파일로 제출해야만 하나?"라며 "건의함이야말로 진입장벽이며 규제"라고 꼬집었다.
이해관계자끼리 뭉쳐 규제완화를 촉구하는 움직임도 생겨났다. 문신 예술가(타투이스트)들은 "해외처럼 문신을 의료행위가 아닌 예술로 봐달라"면서 "의사가 아닌 사람에게도 시술을 허용하라"는 주장을 릴레이로 올리고 있다. 이 주장은 지난달 27일 처음 포털에 올라온 이후 일주일 만에 제안 수가 109건에 달했다.
하지만 규제 개혁이 무엇인지에 대해 국민들의 이해가 아직 부족하다는 점도 제안들을 통해 엿볼 수 있다. 무엇보다 개인적 문제들을 규제개혁 틀로 해결하려는 제안이 많았다. 음악 사업을 하려는데 저작권료가 비싸다거나, 사거리에 면한 땅에 진입로를 내려는데 지방자치단체가 위험하다며 막으니 이를 해결해달라는 식이다. 검찰이 고발을 취하시켰다며 검사를 처벌해달라는 민원도 있었다. 특히 입지, 택지개발, 시설설치 등 부동산 개발 관련된 규제에 관한 제안이 전체 제안의 절반을 넘었다.
규개위 관계자는 "수도권 규제나 개발제한구역을 풀어달라는 요구는 규제 성격도 있지만 국가 정책 차원의 문제라서 받아들이기가 어렵다"고 밝혔다.
뜨거운 반응에도 신문고를 통한 규제 개혁 실적은 아직 미미한 수준이다. 규개위에 따르면 지난 3년 동안 접수한 제안 100건 중 20건은 검토 대상이 될 수 없는 민원이었고, 나머지 80건 중에서도 8건(10%)만이 실제로 개선으로 이어졌다.
규개위 관계자는 "국민의 관심은 갑자기 늘었는데 이를 처리할 인력은 크게 부족해 규제 심사 등 주요 업무도 차질을 빚고 있다" 고 말했다.
김민호기자 kimon87@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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