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일 오후 금융감독원 공시사이트인 전자공시시스템에 이상이 생겼다. 대기업 총수와 CEO(정확히는 등기임원)들의 연봉을 조회하기 위해 접속이 한꺼번에 몰린 탓이었다. 주식에 특별히 관심이 있는 사람들 아니고선 좀처럼 찾지 않는 전자공시시스템이 마비된 건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이날은 12월 결산법인들의 사업보고서 제출마감일. 날짜여유가 충분했는데도, 대기업들은 모조리 이날 사업보고서를 냈다. 이번 사업보고서엔 사상 처음으로 등기임원 연봉액수가 명시됐는데, 기업들은 여론의 역풍을 우려해 마지막 날 마감시간에 보고서를 제출했다. 전자공시시스템이 마비된 것도 이런 연유에서였다.
그래도 역풍은 왔다. 총수들이 받은 수십억~수백억원의 연봉이 낱낱이 공개되면서 여론은 들끓기 시작했다. 특히 사법처리를 받은 일부 오너들이 받은 수백억원 급여에 대해선 '공분'에 가까운 반응이 일었다. 적자회사에서 오너는 수십억 연봉을 받아간 것도 마찬가지였다. "월급쟁이는 평생 일해도 저축한 번 못하는데 말이 되느냐" "근로자들은 무노동 무임금인데 사법처리 총수들은 무노동에도 수십억 임금을 받는다"는 글들이 쏟아졌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이번 연봉공개가 우리나라의 반재벌정서를 몇 배는 상승시켰을 것 같다"고 말했다.
사실 고임금 자체는 뭐라 할 일이 아니다. 좀 배는 아프지만,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돌팔매질할 건 절대 아니라고 본다. 전문경영인 연봉킹(67억원)에 오른 삼성전자 권오현 부회장의 경우, 월급쟁이로 입사해 최고경영자 자리에 오르고 재벌총수보다 많은 월급까지 받게 됐다면 오히려 '샐러리맨의 신화'로, 젊은 직장인들의 '로망'으로 여겨져야 한다. 고액연봉을 절대로 '포풀리즘'식으로 몰고 갈 문제는 아닌 것이다.
중요한 건 고액연봉 자체가 아니라 기준이다. 어떤 기준에 의해 그 연봉이 책정됐는지, 정말로 그 연봉을 받을 만큼 기여를 한 것인지를 따져봐야 한다. 정확히 따져 정해진 연봉이라면 100억원인들 어떻고, 500억원인들 어떨까. 하지만 이번 사업보고서엔 연봉액수만 있을 뿐, 어떤 기준에 의해 책정됐는지는 전혀 들어있지 않다.
이번 연봉공개는 상장기업 투명화의 중요한 첫발이었다. 내년에는 좀 더 진전된 연봉공개가 이뤄져야 한다. 3월31일 오후에 쏟아내는 '소나기 공개'도, 기준도 알 수 없는 '무작정 공개'도 내년엔 개선되길 기대한다.
김현수 산업부기자 ddacku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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