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토머스 앤더슨, 영화팬들 귀에 익은 이름이다. 오락보다 예술 쪽에 치우친 미국 감독이다. '부기 나이트'(1997)와 '매그놀리아'(1999), '데어 윌 비 블러드'(2007), '마스터'(2012) 등이 고집스러운 그의 성향을 뒷받침한다. 자본이란 칼이 목에 들어와도 끄떡하지 않으며 할리우드라는 정글을 헤쳐왔을 듯하다. 그의 영화가 구축한 편견이다.
데뷔작 '리노의 마법사'(1996)부터 세 번째 영화 '매그놀리아'까지 앤더슨은 최종 편집에 간여하지 못했다. 돈줄이 된 영화사가 그의 초기작 세 편을 주물렀다. 네 번째 영화 '펀치 드렁크 러브'(2002)에 이르러서야 앤더슨은 최종 편집권을 가졌다. 예술영화 시장에서 상품성을 인정 받은 뒤였다. 제 아무리 예술 성향 짙은 영화라도 자본의 통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앤더슨의 초기 이력이 잘 보여준다.
지겹도록 들었겠지만, 영화는 예술과 산업이 공생하는 매체다. 돈을 많이 쏟아 부은 영화일수록 스튜디오의 간섭이 심하다. 감독이나 배우 등의 자의식만 충족시키는 대작이 나올까 신경을 곤두세우는 게 자본의 본능이다.
'어벤져스: 울트론의 시대'(어벤져스2)가 서울 일대에서 촬영 중이다. 16일간 서울ㆍ경기의 여러 곳을 통제하고 촬영을 하며 시민 불편을 초래하는데 한국이 30억원 넘는 돈까지 지원하는 게 말이 되느냐는 비판이 있다. 지지하는 쪽은 상영시간이 120분 남짓일 이 영화의 20분에 한국이 담길 것이며 이에 따른 국가 홍보 효과가 2조원에 달한다고 주장한다.
'어벤져스2'는 추정 제작비가 2억달러(약 2,200억원) 내외다. 한국에서 쓸 돈은 130억원 정도라고 한다. 영화진흥위원회(영진위)의 외국영상물 로케이션 인센티브 사업에 따라 '어벤져스2'는 사용하는 돈의 30%(약 39억원)를 돌려 받는다. 단순 계산으로만 보면 한국은 제작비의 1.8%에 해당하는 돈을 쥐어주고 상영시간의 16.6%가 한국 내용으로 채워지도록 보장 받은 셈이다. 더군다나 '어벤져스2'는 90억원의 돈을 순수하게 쓰고 간다. 교통 통제에 따른 사회적 손실을 따져도 지나치게 남는 장사다. 이렇게 보면 '20분'을 담보로 '어벤져스2'의 촬영을 유치한 관계자들은 봉이 김선달의 후예가 확실하다.
과연 그럴까. 영진위에 물었다. 20분이란 시간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 다만 영진위 관계자는 이런 말을 했다. "'어벤져스2'에 인센티브를 지원할지 평가할 때 한 평가 위원이 희망 섞인 말을 했다. '그래도 30억원 넘는 돈을 지원하는데 한국 관련 내용이 10분 이상 담겨야 하는 것 아니냐'고. '어벤져스2' 제작사 마블스튜디오는 영화 속에 한국이 얼마나 담길지 언급하지도 않았다." 국내 관계자들이 마블스튜디오와 어떤 밀약을 했는지 몰라도 20분의 출처는 현재 오리무중이다. 그런데도 한국관광공사는 20분을 근거로 국가 홍보 효과 2조원을 추정했다.
'어벤져스2'는 한국을 홍보하기 위해 기획된 영화가 절대 아니다. 세계 시장을 겨냥해 이익을 극대화하는 게 이 영화의 궁극적 목적이다. 자본의 논리에 따라 영화의 상영시간과 내용이 최종적으로 정해진다. 영화계 일각에선 "만약 '어벤져스2'가 한국 내용을 20분 이상 담지 않으면 사기극 논란이 일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나온다.
세계는 지금 대형 영상물 촬영 유치 사업에 힘을 쏟고 있다. 독일 베를린 시정부는 청룽(成龍) 주연의 '80일간의 세계일주'(2004) 촬영을 유치하기 위해 시민이 많이 찾는 겐다르멘마크트 광장을 8주간 폐쇄한 적이 있다. 돈이 되기 때문이다. 한국도 외국영상물 촬영을 적극 유치해야 한다. 그러나 한건주의를 바탕으로 한 엉뚱한 경제 효과 발표 등은 불필요한 논란을 부르고 영상물 촬영 유치 사업을 방해할 뿐이다.
라제기 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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