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재호(72) 전 대주그룹 회장의 '황제 노역' 판결로 빚어진 지역법관(향판ㆍ鄕判)제 논란과 관련, 대법원이 지역법관들도 다른 지역에서 순환 근무하게 하는 방안을 시행하기로 했다. 지역법관들은 고법 단위 권역에서 퇴임 때까지 계속 근무해 왔는데, 광주지법에서 근무하다 부장판사 등으로 승진하면 부산, 대구, 대전 고법 관할 지역 중 한 곳의 법원으로 옮겨 최소 2,3년 근무하는 권역 외 '순환 근무'를 제도화하겠다는 것이다.
대법원 관계자는 31일 "지난 28일 전국 수석부장판사 회의에서 지역법관 순환 근무에 대한 공론이 모아졌다'면서 "법원조직법에 따라 대법원장이 결정하면 금명간 순환 근무 원칙에 대한 규정을 두는 쪽으로 제도를 보완해 시행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현재는 지역법관이 특정 법원에서 근무하는 기간 등에 대한 별도의 규정이 없다.
지역법관제는 일부 법관을 고법 단위 권역에서 퇴임 때까지 계속 근무하게 하는 것으로, 법관들의 수도권 선호 현상이나 잦은 인사이동으로 인한 부작용을 줄이기 위해 2004년 도입됐다. 현재 지역법관은 고법 별로 30~40% 정도로 점점 늘어나는 추세다.
지역법관들은 그동안 지역 내 장기 현안을 꼼꼼히 살펴 판결하고 지역의 사정을 판결에 능동적으로 반영하는 등 비교적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울산 지역의 한 변호사는 "지역법관들이 지역개발이나 경제사정 등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복잡한 기업간 소송이나 파산 문제를 다룰 때 이해도가 높아 변호사들도 편하다"고 말했다. 인사이동으로 담당 판사가 자주 바뀌어 재판이 지연되는 문제 등도 상당부분 해결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반면 '향판'이라는 별칭처럼 고향 등 연고지에서 장기간 근무하는 과정에서 지역 유착 등 일부 문제점도 드러났다. '황제 노역' 판결은 그런 문제의 극단을 보여준 사례다. 현행법상 벌금을 대신하는 노역장 유치기간이 3년 이하로 규정돼 있어 벌금 액수가 높을 경우 억대 일당 노역 판결이 나올 수밖에 없는 구조이지만, 허 전 회장처럼 단 50일만 노역하면 벌금 254억원을 전액 탕감 받는 비상식적인 판결은 전례가 없다.
이 때문에 법원 내에서도 말 많고 탈 많은 지역법관제를 아예 없애자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하지만 법조계에서는 필요성이 분명히 있고 장점도 적잖은 제도인 만큼 폐지보다는 보완하자는 목소리가 우세하다. 지역 근무 경험이 많은 한 고위법관은 "지역법관제를 폐지하고 무조건 순환 근무로 돌리면 경력 법조인 가운데 판사를 뽑는 '법조일원화' 정책은 절대 유지될 수 없다"며 "지역 내에서도 시군 별로 순환 인사가 가능한 만큼 장점을 살리면서 문제점을 보완하는 쪽으로 고민하는 것이 낫다"고 말했다.
대법원은 보완책으로 권역 외 순환 근무 외에도 ▦외부활동 규제 예규 마련 ▦지역법관의 고향 배치 제외 등을 검토 중이다. 지역법관들은 공익적 목적의 위원회에 법률직 위원으로 임명돼 활동하면서 지역 유력자들과 관계를 맺는 경우가 많은데, 대법원 예규나 법원조직법 어디에도 이 같은 외부 활동을 규제하는 조항은 없다. 부산 지역의 한 부장판사는 "문제는 법관이 공익을 빙자한 사실상의 사조직 모임에 참가하는 것인데, 이를 규제할 조항이 마련되면 부정적인 유착 관계가 대폭 줄어 들 것"이라고 말했다.
출신지 근무를 금지하자는 의견도 있다. 검찰처럼 고향이나 출신 학교가 있는 지역의 근무를 가급적 배제하는 '상피(相避)'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광주 지역의 한 판사는 "동창이 밥이나 먹자고 나오라는 자리에 가면 항상 지역 기업의 사장이나 이해관계인이 끼어 결국 '민원' 해결의 단초가 되는 게 현실"이라며 "대한민국이 혈연과 지연에 특히 관대한 점을 고려하면 법원도 상피제 도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재호기자 next88@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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