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청 파일 유포로 위기에 몰렸던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총리가 30일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예상을 깨고 압승했다. 수개월간 그를 괴롭힌 반정부 시위와 언론탄압, 부패 스캔들 등 잇따른 악재를 뿌리친 것이다. 8월에 열릴 대통령 선거에도 청신호가 켜졌다.
31일 AFP통신에 따르면 개표가 95% 완료된 가운데 에르도안이 이끄는 정의개발당(AKP)이 득표율 45%를 기록, 제1야당인 공화인민당(28.5%)에 압승했다. 정의당은 최대 도시인 이스탄불과 수도 앙카라를 비롯해 전국적으로 큰 승리를 거뒀다. '술탄(이슬람에서 '군주'를 뜻함)'으로 불리는 에르도안 총리는 수천 명이 운집한 정의당 본부 발코니에서 승리를 선언하며 "유권자들이 새로운 터키를 건설하려는 노력을 보호했다"고 평가했다. 또 부패 스캔들 수사에 앞장선 검찰과 도청 녹음파일 배후로 지목한 종교운동가 페툴라 귤렌 등을 겨냥, "저들의 소굴로 들어가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1954년 이스탄불 외곽 가난한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난 에르도안 총리는 자수성가한 정치인이다. 그는 이슬람계열 기숙형 고교를 나와 마르마라공립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했다. 대학 졸업(81년) 후 이슬람복지당에서 활동했던 그는 94년 지방선거에서 이스탄불 시장으로 당선, 4년 임기 동안 상수도, 교통, 대기오염 등 산적한 문제를 해결해 나갔다.
그러나 1998년 터키 헌법재판소는 정교분리 위반이라는 위헌 사유를 들어 그가 속한 이슬람복지당을 해산하고, 그 역시 이슬람을 선동한 혐의로 99년 투옥되며 큰 정치적 시련을 겪었다. 그는 굴하지 않고 2001년 정의당을 창당한 후 2003년 총선에서 승리하며 59대 터키 총리에 올랐다. 그는 한번 결정된 정책은 불도저처럼 밀고 나가는 강력한 추진력으로 수 차례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지원을 받을 정도로 허약했던 터키 경제를 개혁해 연 평균 7% 안팎의 높은 성장률을 달성하고, 유럽연합(EU) 가입 협상을 진행할 정도로 경제를 일으켰다. 덕분에 2007년, 2011년 총선에서도 승리해 지금까지 터키를 이끌어 왔다.
경제성장으로 인기를 누렸던 그도 이번 지방선거를 앞두고는 큰 위기에 직면했다. 지난해 여름 반정부 시위에 이어 뇌물 스캔들에 휘말린 것. 특히 그와 그의 아들로 추정되는 인물이 10억 달러를 은폐하려는 내용의 전화 녹음 파일이 공개되면서 반정부 시위가 전국적으로 번졌다. 터키 리라화가 폭락하고, 주식시장이 얼어붙었으며, 아랍의 봄 이후 이슬람국가의 민주주의 모델로 평가 받던 터키에 대한 믿음마저 흔들렸다. 에르도안 역시 강경진압으로 맞서 사상자가 발생하는 유혈시위로 번졌고, 트위터와 유튜브 등 SNS를 차단해 국제적인 큰 비난을 샀다.
앙카라대학 메흐멧 아키프 오크루는 "강대국과 인권단체의 비판을 받았어도 스캔들로 인한 타격이 작아 에르도안이 살아 남았다"며 "부정부패가 심각해도 유권자들은 에르도안 집권기 누린 혜택과 위상을 유지하려고 그를 지지했다"고 분석했다. "노동자와 종교인을 공략해 지지기반을 다졌다"(영국 BBC방송)는 평가도 나왔다.
지방선거로 자신감을 얻은 에르도안은 터키 국민이 최초로 직접 선거로 뽑는 대선을 겨냥하고 있다. AFP는 "권위주의적인 조치가 선거에서도 아무런 흠집을 내지 못한 것을 본 에르도안은 더 큰 야망을 위해 밀어붙일 것"이라고 했다. BBC는 "야권 단일화 실패로 어부지리를 얻은 에르도안이 관련법을 고쳐 2015년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4연임 할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박민식기자 bemyself@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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