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회자정리(會者定離ㆍ만나면 반드시 이별한다), 거자필반(去者必返ㆍ떠난 자는 반드시 돌아온다)이라는 성어가 인터넷 인기 검색어로 오른 적이 있다. 이들 사자성어가 갑자기 인기를 모은 것은 KBS 1TV 대하사극 '정도전' 때문이다.
22일 방송된 23회분에서 권모술수에 능한 정치인 이인임(박영규)이 유배를 떠나며 정도전(조재현)과 맞닥뜨렸는데 이 자리에서 정도전이 "세상은 바뀐다"며 "불가의 중들이 하는 말 중에 회자정리가 있다"고 일침을 놓자 이인임이 "거자필반이라 하였다"며 긴 여운을 남긴 것이다.
'정도전'은 15~16%대의 높은 시청률을 자랑하며 정치 사극의 대를 잇고 있다. '정통 사극은 죽었다'는 방송계의 평가를 무참히 깨고 화려하게 사극 부활의 신호탄을 쏘아 올린 것이다. 그 일등공신이 강병택 PD다. '정도전'을 만들고 있는 그를 서울 여의도 KBS 별관에서 만났다.
"이렇게까지 많은 관심을 받을지 몰랐다"며 운을 뗀 강 PD는 "시들어 버린 정통 사극에 대한 관심을 어떻게 다시 살릴 것인가가 가장 큰 숙제였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KBS에 입사하자마자 '용의 눈물' 연출진으로 참여하면서 사극과 인연을 맺었고 이후 '해신'(2004), '거상 김만덕'(2010) 등을 통해 '사극 잘 만드는 연출가'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KBS는 '대왕의 꿈'(2012)이 기대와 달리 고전하다 종료된 뒤 정통 사극에 쉽게 도전하지 못했다. 내부적으로도 "사극이 바뀌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컸고 강 PD 역시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그는 지난해 1월 KBS 미니시리즈 '프레지던트'와 KBS 아침극 '사랑아 사랑아'를 집필한 정현민 작가와 손 잡고 정도전 이야기를 담아보기로 했다. "이제껏 '사극=왕의 이야기'라는 공식이 있었는데 그걸 깨고 싶었습니다. 그러자면 새로운 인물과 배경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최근까지 사극의 배경이 고대사였기 때문에 이제 조선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조선 건국의 배후에 어떤 인물이 있었는지 조명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면서 정도전, 이인임 등을 떠올렸습니다."
무엇보다 기존 사극과 달라야 한다는 부담이 컸고 그 때문에 배우 캐스팅도 심사숙고했다. 특히 드라마 초반을 끌고 갈 이인임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여겼다. 그런 강 PD에게 배우 박영규는 '신의 한 수'였다. "사극 하면 쉽게 떠올릴 수 있는 배우로 가느냐 아니면 새로운 배우로 가느냐를 놓고 고민했는데 박영규씨가 마지막 카드였어요. 제가 만든 드라마 가운데 '해신'을 떠올렸더니 박영규씨의 성량 좋은 목소리가 기억나더라고요. 시놉시스를 보여드렸더니 '하루만 시간을 달라' 하더군요. 다음날 바로 '한 번 가보자'라는 답이 왔죠."
이인임의 캐스팅이 끝나자 최영 장군 역할을 누구에게 맡길지에 비상이 걸렸다. 강 PD는 "원래는 배우 임동진이 최영 장군으로 캐스팅됐다"고 공개했다. 그러나 첫 촬영을 앞두고 건강상의 문제로 하차해 부랴부랴 서인석으로 교체했다. 강 PD는 임동진의 예상치 못한 하차와 관련해 "촬영 3일 전 일어난 일이라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고 했다.
"말을 타면서 연기도 잘하는 배우는 찾기가 힘듭니다. 서인석씨는 말을 타는 것은 물론 연기력도 뛰어나기 때문에 천군만마를 얻은 듯했습니다. 그가 백발을 늘어뜨린 분장을 하고 나타났을 때 '아! 운명이구나' 했어요."
서인석씨의 연기에 강 PD는 새삼 놀랐다고 했다. 특히 30, 31회쯤 방송될 최영 장군의 생사가 달린 장면의 연기에 강 PD는 "나까지 눈물이 나더라"고 감탄하면서 배우들의 연기 능력을 드라마의 성공 요인으로 꼽았다.
'정도전'은 50~60대 남성 시청자들에게 유독 인기가 많다. 그는 "현재의 답답한 정치 상황과 맞물리는 부분이 있는 듯 하다"며 "정도전은 10년 간 유배생활을 하며 민중의 삶을 살았는데 남성 시청자들이 이를 통해 정도전을 '실천하는 지성인'으로 보며 공감을 나타낸 것 같다"고 말했다.
총 50부으로 기획된 '정도전'은 이인임의 퇴장으로 1막을 끝내고 요동 정벌, 위화도 회군 등의 이야기로 2막을 채운다. 이성계, 최영, 정도전, 정몽주 등의 이야기가 2막에서 본격화한다. 강 PD는 "처음부터 시청률에 연연하지 않았다"고 했지만 방송계에서는 2막이 1막의 인기를 이어갈 수 있을지 주목하고 있다.
"인터넷 실시간 검색어로 사자성어나 위화도 회군, 철령위 등 '정도전'과 관련한 내용이 나오면 기분이 좋습니다. 드라마를 통해 역사를 알아가는 젊은 세대를 보면 보람까지 느낍니다. 시청자게시판에서 요동 정벌을 놓고 토론이 이어지고 있으니 제가 생각한 소기의 목적은 벌써 달성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강은영기자 kiss@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