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3월 당시 '1박2일'의 수장이었던 이명한 PD를 만난 적이 있다. 그는 대뜸 남극에 갈 거라고 말했다. 농담인 줄 알았다. 하지만 자못 진지한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이거 장난이 아니구나 싶었다. '1박2일'과 남극. 당시만 해도 어딘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라 여겼다. 남극 하면 교양 프로그램이나 다큐멘터리 같은 데서나 언급되던 장소가 아닌가. 그런데 예능 프로그램이 남극에 간다니.
일은 실제로 벌어졌다. 방송을 통해 '1박2일' 출연자들이 남극세종기지 대원들과 화상통화를 하는 장면이 방영됐다. 당시 방송에는 남극세종기지 대원들을 위해 가족들의 소포를 전달하려는 계획 등 구체적인 내용이 담겨 있었다. '1박2일'은 또 극지연구소, 환경부, 국토부, 외교부 등 각 기관의 지원을 받았으며 다큐멘터리를 제작해도 될 만한 고가의 카메라 장비들을 준비했다. 하지만 실행을 앞두고 칠레에 강진이 일어났다. 결국 프로젝트는 실행 직전에 무산되었다.
이명한 PD와 나영석 PD가 모두 '1박2일'에서 손을 떼고 CJ 행을 결정하면서 남극 프로젝트는 한때의 해프닝으로 마무리되는 듯 했다. 하지만 2012년 '1박2일' 시즌2의 새로운 수장으로 최재형 PD가 자리하면서 다시 '남극 프로젝트'가 거론됐다. "'1박2일' 당시 준비했다가 칠레 대지진으로 아쉽게 무산된 남극행에 다시 도전할 것을 고려하고 있다"고 밝혔던 것이다. 하지만 이 또한 실행으로 옮기지 못했다. '1박2일'에 대한 관심이 예전만 못했고 시청률도 떨어지고 있던 터라 남극 방문 같은 거대 프로젝트를 꿈꿀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2013년 말 유호진 PD가 시즌3의 수장으로 들어오면서 또다시 남극이 거론됐다. 그는 멤버들의 '야생성'이나 팀워크가 다져지면 "지난 시즌들처럼 거대 기획을 할 것"이고 "제1 순위는 남극행"이라고 말했다. 물론 이 일이 쉽지 않다는 데 현재의 제작진이나 출연자 모두 공감하고 있다. 작년 말 전남 신안군 비금도로 들어가려다 기상 악화로 풍랑주의보가 발령돼 여행 자체가 무산되자 차태현은 농담을 섞어 "남극은 무슨. 코앞에 있는 섬도 못 가면서 무슨 남극을 간다고 그러냐"고 말하기도 했다.
남극 도전에 대한 '1박2일'의 의지는 굳건하다. 하지만 거기에 또한 난점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물론 남극의 세종기지는 우리의 영역이지만 국내 여행을 모토로 하는 '1박2일'이 해외로 나간다는 건 여전히 부담이다. 자칫 명분을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도 1박2일이 아닌 꽤 오랜 시간이 소요될뿐더러 거대 프로젝트 이후의 아이템들이 상대적으로 소소하게 될 가능성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박2일'이 남극 행을 버리지 못하는 데는 이 프로젝트가 가진 상징성이 너무나 크기 때문이다. 지금껏 예능이 밟지 못했던 남극에 마치 예능의 깃발을 세우는 것만 같은 의미가 있다. 이미 다큐나 드라마 영역을 상당 부분 예능이 침범하고 있는 것이 최근 방송의 경향이다. 교양의 시대가 저물고 놀이와 재미의 시대가 열리고 있기 때문이다. 언제가 될 지 모르겠지만 만일 '1박2일'이 남극에 실제로 발을 딛게 된다면 그것은 마치 닐 암스트롱이 달에 발을 디디며 우주의 시대를 예고했듯이 새로운 '예능의 시대'를 예고하는 일이 될 것이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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