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해욱(40) 시인이 5년 만에 세 번째 시집 를 냈다. 'syzygy'는 삭망(朔望), 연접(連接) 등을 뜻하는 말로 천문학에서는 해와 달과 지구가 일직선에 있는 상태를, 생물학에서는 어느 원생동물의 생식법을 가리킨다. 하지만 시집에 'syzygy' 제목의 시는 없다. 어떻게 읽어야 할지 당황스런 저 단어를 본 순간 시인은 "난감한 에로티시즘에 사로잡혔"고, 다만 "부적을 붙이는 심정"으로 "이 책의 이름을 syzygy라 짓는 수밖에 없"었다. "닿을 듯 닿을 듯 소리는 혀에 닿지 않고 뜻은 뇌에 닿지 않는", "나의 시야에도 나의 삶에도 닿지 않는" 말이기 때문이다. 닿지 않는 것에 기필코 닿으려는 사투, 그것은 시의 또 다른 이름이다.
집요하게 '나'를 주어로 반복했던 전작 시집 으로 '주체성의 위기'라는 시대의 징후를 섬세하고 아름답게 그려냈던 시인은 이제 '나'에서 '나-너', '나-당신', 급기야 '우리'로 시야를 확대한 듯 보인다. 서시 격인 첫 시의 제목은 '체인질링'. 동화에 흔히 나오는 뒤바뀐 아이를 뜻하는 '체인질링'처럼 많은 시 속에서 '나'는 '너'가 되고 '당신'이 되고 '우리'가 된다. 수많은 '나들'이 저마다 중심을 이루는 "동심원들이 찰랑거"리고, 결국 겹치게 마련인 그것들을 일러 시인은 "나의 아름다운 악몽"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손을 꼭 잡고 / 세 개의 젓가락으로 밥을 먹어야 하는 사이"('4인용 식탁' 중)다.
그러나 시인이 호명하는 '우리'는 견고한 세계의 틀로 보자면 '졸(卒)들'이다. 개성이 몰개성의 동의어여서 "사복을 입고 있는데도 우리는 모두 이름이 같"고, "이름이 밝혀질 때마다 벌거벗기는 기분에 사로잡힌다." '장군'도 '멍군'도 아닌 한낱 '졸들'이므로, "우리는 줄을 서야 한다. 우리는 결번으로 시작되는 수열을 완성해야 한다." 빠진 것을 채우는 '졸들'의 역할에는 결핍과 고독과 소외가 필연적이어서 '나'는 "좌표를 잃은 것 같다. // 미래를 팔아 동정을 산 것 같다. // 썩은 동아줄에 매달려 / 흔들리고 있는 것만 같다. // 깊은 소외감을 추슬러 / fuck, 나는 기껏 운다."('허와 실' 중) 하여 "단추의 위치가 바뀔 때마다 새 삶이 시작된다고 믿"는 뇌와 손이 없는 옷('복고풍 이야기')은 세계를 혁파하지 않고 고작 자기만을 계발할 뿐인 오늘날의 우리에 대한 급진적 알레고리로 읽힌다.
신해욱의 시는 짧다. 살찐 언어를 경계하듯 긴축과 내핍으로 '말의 뼈'만을 남기는 그의 시는 간결하고 투명하다. 초현실주의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 신선하고 강렬한 시각적 이미지도 두드러진다. 시인은 뿌리가 살아 있는 머리카락을 화분에 심고선 "내 영혼의 형식으로 열매가 무르익게 되면 / 꼭지를 따서 손바닥에 올려놓고 / 목이 없는 새에게 / 모이를 주는 방법을 배울 것"이라고 말하고, 바다에 돌을 던지다 팔이 빠지자 "영원한 포물선을 그리는 건 / 나의 소원. // 나의 어깨에서 분리된 / 나의 그래프. // 옆구리에서 흘러나오는 꿈을 / 나는 막아볼 수가 없고"('비둘기와 숨은 것들')라고 노래한다.
그의 시는 행과 행 사이의 여백이 넓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독자에게는 종종 사색이 요구된다. "표절할 겨를도 없이 허락받"은 이 세계에서의 삶은 명확하게 구획되어 있어, 시인은 자주 '생각의 모서리' 를 만지작거리고('터치'), 그의 목에는 늘 "묵음들이 가득 고여 있"기 때문일 것이다('뮤트'). 구구절절 다 말하지 않는 이 시인은 "봐라, 이렇게 맹렬한 현재에는 / 어울리는 게 하나도 없다"('산초 판자의 말씀')고 쓴다. 그 문장들을 "가파른 각도로 연필을 잡고 / 낭떠러지를 떨어져버리는 것처럼"('겨울을 나는 방법') "왼손과 오른손의 / 사이에서 / 어느 쪽으로도 귀속되지 않는 / 참을 수 없는 선율이 발생할 때까지"('환생연습') 그는 썼을 것이다.
시인은 이번 시집에 해설을 따로 붙이지 않았다. "백 사람이 읽으면 백 가지의 오독이 나오길 원했기 때문"이다. 그 오독을 위해 "내 잃어버린 생각의 자유들"('선물')을 소환할 때다.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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