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쓰는 건 영화평이 아니다. 근데 그 얘기부터 몇 줄 적어야겠다.
배우들한테 별점을 매겨 볼작시면 이렇다. 문소리 두 개 반(다섯 개 만점). 그의 능력을 알기에 짜게 줬다. 짐짓 일부러 힘을 죽이고 연기한 건 알겠는데, 나라만신의 굿거리가 어디 어깨 힘만 뺀다고 저절로 흉내 내어 질까. 태만했다. 류현경 세 개. 무업을 짊어진 인생의 굴곡을 표현해 내기에 그의 표정과 몸짓이 짓는 페이소스는 아직 평면적이다. 더 깊어지길. 김새론 네 개. 이 어린 배우의 미래가 궁금할 뿐. 눈빛의 귀기가 살아 있다. 그리고 김금화, 다섯 개!
지금 상영 중인 세미 다큐멘터리 '만신'(감독 박찬경)엔 무당 김금화의 삶을 세 배우가 연이어 재연한 드라마가 삽입돼 있다. 중간중간 인터뷰 형식으로 김금화가 직접 영화에 등장하는데, 그니가 찬찬히 들려주는 황해도 만신의 삶은 어떤 영화적 기교 없이도 영화적이다. 다큐멘터리와 드라마의 경계를 허문, 쇠걸립(내림굿을 받기 전 마을을 돌며 무구(巫具)를 만들 쇠를 얻는 일)을 도는 어린 시절의 김금화(김새론)를 여든 셋의 김금화가 말없이 따라가는 이 영화의 엔딩신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그 여운 속에 7년 전 그니가 쓴 자서전을 다시 꺼내 폈다. .
이제부터 책 얘기다. 넘세는 김금화의 어릴 적 이름이다. 1931년 황해도 연백군 석산면의 가난한 포구마을에서 그니는 아들을 간절히 원하는 집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넘세라는 이름은 남동생이 '넘석하고(어깨 너머로 들여다보고) 있다'는 뜻으로 붙인 것이다. 그니가 비단꽃(錦花)이라는 지금의 이름을 얻은 건 아래로 남동생이 둘이나 태어나고 난 뒤인 열세 살 때. 이 책은 그렇게 천덕꾸리기로 나서 평생 골이 깊은 삶을 살아야 했던 한 사람의 이야기다. 그건 현재에 꽁지가 닿아 있는 지나간 한 두름의 세월 이야기이기도 해서, 어쩔 수 없이 시리고 아프고 짠 것이었다. 그렇다 치더라도 이 책의 주인공에게 그 세월은 유독 모질었다. 그니가 무당이기 때문이다.
책은 연대기 순으로, 회고의 말투로 기술돼 있다. 신파로 흘러가 버릴 수도 있는 얘기지만 감정이 절제돼 있다. 그래서 읽어내기에 담박하다. 짐작건대 그니가 늘 신을 모시면서 복은 나누고 한은 푸는 일을 하는 만신이기 때문일 것이다. 큰 강 같은, 너울 이는 바다 같은 세월의 출렁임이 고이 달래져 책 속에 담겨 있다.
언제부턴가 김금화는 큰 무당, 나라만신으로 사람들이 추켜세우는 대상이 됐다. 그러나 이 책에서 그니는 자신을 부각시키려 들지 않는다. 다만 한 무당의 인생을 솔직히 털어놓음으로써 한국의 무속신앙이 본디 어떤 것인지, 불과 반 세기 전까지 신과 더불어 살았던 한국인의 삶이 어떠한 것이었는지, 그것을 천시하고 멸시했던 우리의 과거가 얼마나 본데없는 것인지를 들려준다. 그 속엔 서해안 굿의 종류와 의미와 순서, 굿을 청하는 사람과 굿을 모시는 무당의 자세 또한 기록돼 있다. 모두 경험에서 나온 이야기이니 생생하고 세세하다. 이 책은 자서전인 동시에 민속지인 셈.
정신대 징집을 피해 얼굴도 모르는 남자에게 시집을 가야 했고, 학대에 가까운 시집살이를 못 견뎌 도망쳐야 했고, 끝내 피하고 싶었던 무업을 신병을 치른 끝에 이어받아야 했고, 천대 속에 꿋꿋이 신과 인간을 매개해야 했던 지난 세월이 잔잔한 목소리로 다가온다. 사실 그건 비슷한 세월 무업을 지켜온 다른 이들과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김금화라는 무당이 특별한 것은 무속의 가치를 제대로 알리는 데 앞장섰다는 데 있다. 그니는 각종 민속 경연대회에 참석해 굿거리와 공연의 경계를 허물고 매스컴을 적극적으로 이용해 굿의 의미를 알렸다. 그래서 스스로 인간문화재가 되기도 했는데, 그것이 무업의 본령에서 벗어났다는 비판 혹은 질시의 이유가 되기도 했다. 어쨌든 우리 무속신앙이 소중한 전통문화 대접을 받게 된 데 그니의 역할은 대단히 컸다.
황해도 굿 가운데 만수대탁굿이란 게 있다. 노인들이 살아 생전 극락왕생을 바라며 닷새 동안 벌이는 아주 큰 굿이다. 듣자니 10년에 한 번쯤 벌어진다는 그 판을, 김금화는 3년 뒤에 한번 더 벌일 작정이라고 한다. 그 굿을 꼭 보고 싶다. 그때까지 이 만신이 건강할 수 있도록, 진짜 어디다 치성이라도 드려야겠다. 덧붙여 는 절판됐고 최근 증보판 (궁리 발행)가 나왔다.
유상호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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